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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커플생활매뉴얼

제가 왜 남친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건지 납득이 안 가요.

by 무한 2018. 1. 6.

일단 난,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오히려 이 관계는 오래 전에 끝났어야 하는데, 둘 다 정 많고 헤어지는 걸 겁내다 보니 여기까지 끌고 오게 된 것 같다.

 

아래에서 할 이야기는 P양이 미워서라거나 P양을 나쁘게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P양의 다음 연애(그게 이 사람과의 재회든,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든)를 위해 하는 얘기니, 자기변호 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내려두고 전체를 조망한다는 생각으로 한 번 읽어줬으면 한다. 출발해 보자.

 

 

1.데이트는 둘이서, 힘든 건 혼자 알아서?

 

난 P양이, 오랫동안 남친과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친의 회사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남친이 여러 핑계를 대며 ‘결혼할 때 되면 알려주겠다’고 해서 P양이 더 안 물었다고는 하지만, 한두 해 사귄 것도 아닌데 그런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인 관계라면, 두 사람은 연인이라기보다는 그냥 같이 먹고 마시고 노는 데이트메이트에 더 가까운 것 아니었을까?

 

일과 관련해 남친이 힘들다는 걸 표현했을 때, P양이 보인 반응을 보자.

 

“힘들다길래 일단 냅뒀어요. 어차피 물어봐도 뭔지 안 알려 줄 테니까.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냅뒀어요.”

 

둘에겐 저런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 결과 수년을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불안, 상대와 얽혀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대략의 추측만 할 뿐 구체적으로 알진 못했다.

 

또, 저런 ‘일단 냅두는 상황’일 때 P양이 남친에게 바랐던 것들을 보자.

 

-쉴 땐 쉬더라도 안부인사 정도는 꾸준히.

-혼자 쉬지만 말고 좀 만나기도 하면서.

-이러면 난 멀게 느껴지고 외로우니 그러지 말고.

 

P양은 ‘멀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실제로 둘은 멀다. 닭살 돋는 대화도 하고 데이트도 하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서로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잘 모르며, 고민이 있을 땐 혼자 알아서 해결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건 마치 삶 따로, 사교생활 따로의 모습처럼 만나는 관계가 되었고, 삶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사교생활 쪽에서 ‘이쪽에도 집중할 것’을 요구하니, 자연히 그것부터 잘라내려는 마음이 드는 것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게 P양의 잘못으로만 이렇게 된 건 아니다. P양의 남친이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폐쇄적이었으며, 연애에서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 채 이끌어 가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로 그는 데이트비용을 100% 부담했으며, 자기가 못 먹는 걸 P양이 먹자고 해도 못 먹는다고 말은 안 하곤 같이 가선 다 남길 정도였다.

 

그렇게 혼자 다 짊어지고 혼자 다 부담하려고 하다가 자기 삶의 위기가 오자 손을 놓기로 한 것 같은데, 그랬기 때문에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놀긴 했지만 진정으로 친해지지는 못한, 그 부분이 난 참 아쉽다. 열 번의 헌신과 이해를 하는 대신 한 번의 솔직한 대화를 했으면, 그렇게 노력하고도 결국 이런 마지막을 맞이하는 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2.작긴 하지만 계속 축적된, 남친 골탕 먹이기.

 

연애 중 당연히 상대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 있긴 한데, 그 방식이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일부러 연락을 안 받아 애타게 만드는 것.

-상대 얘기는 잘라버리고 내 얘기만 하는 것.

 

인 경우 그게 이쪽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까지를 부를 수 있다.

 

P양의 경우 저런 ‘형벌’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만족스러운 분위기가 아닐 때 그저 폰만 들여다보며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데이트를 미루는 것에 화가 나 상대 연락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남친이 계획을 짜왔는데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칼에 거절하며 P양이 하고 싶은 걸 하려 했다.

 

저래버리면 연애가 끝나는 건 시간문제다. 연애가 무슨 한 번 사귀면 죽을 때까지 내내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노예계약도 아닌데, 무시와 불공평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사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처음에야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더 좋아하고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버틸 수 있겠지만, 저런 일이 거듭되면 ‘계속 사귀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걱정되는 건, P양이 이런 불공평한 연애를 너무 오래 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으로 굳어지거나, ‘내 기분 상하면 남친이 기분을 풀어줘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상당한 것 같다. 보통의 남자와 만나 연애를 했다면 지금의 상대처럼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져주거나 맞춰주진 않았을 것이기에 부딪히며 다듬어질 수 있었던 부분이, 모난 모습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어도 그냥 펼쳐보진 않은 채 덮어두기로 하고, 힘들다고 하면 며칠 내버려 두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고, 또 불만인 게 있으면 심통 부리듯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어 상대가 기분 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해 왔다는 점이 염려된다. 이런 연애는 그냥 내 맘대로 해도 되며 언제든 내가 이길 수 있으니 ‘큰 감동이나 애틋함은 없지만 편하고 쉬워서’란 이유로 지속되곤 하는데, 그런 이유로 지속했던 연애에 길들여지면 훗날 ‘보통의 연애’를 하는 것도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지금도 P양은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는데, 그걸 일이 힘들다는 구실로 이별통보 한 건 아닌지?

-헤어진 이후 연락이 한 번도 없는 거 보면, 다른 여자 생겨서 헤어진 거 아닌지?

-남친은 여태껏 자긴 권태기 없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건 뭔지?

 

라는 질문만을 하고 있는데, 그런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나 같은 남자와 만나 이만큼 연애했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돌아봤으면 한다. 그랬다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헤어지진 않았을지, 날 방치하고 내게 관심도 안 두면서 데이트와 관련된 불만만 표시하는 그가 내겐 어떻게 느껴졌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한다.

 

 

3.남의 연애가 아니라, P양의 연애다.

 

헤어진 지금도 P양은 ‘헤어지자고 한 남친의 속마음’을 내게 묻고 있는데, 그런 건 직접 묻는 게 낫다. 마지막 대화에서도 둘은 무슨 남의 소식 전하듯 서로 이별통보를 주고받던데, 그게 도무지 말을 할 줄 모르는 상대 때문이든 뭐든 P양까지 거기 동조해 막연한 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또, P양의 경우

 

“제가 속마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겠죠. 그냥 너무 힘들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너한테 식은 게 아니라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치만 그게 큰 이유는 아니다. 회사일이 너무 스트레스여서 널 잘 챙겨주지 못할 것 같다. 미안하다. 나도 복잡해서 내 맘을 잘 모르겠다. 니가 잘 지냈음 한다. 라고.”

 

라며 ‘예상되는 답변’을 짐작한 후 그걸 사실로 믿어버리곤 아예 말도 안 꺼내는데, 그래버리면 서로 짐작과 추측하며 만나는 까닭에 실제로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영영 알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하자.

 

남의 연애가 아니라 P양의 연애다. 상대가 말을 안 한다고 해서 P양도 말을 안 하거나, 상대에게 의뭉스러운 점이 많다고 해서 P양도 사생활과 비밀을 늘려가는 것으로 대응하면 곤란하다.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상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한다면, 그땐 얼른 P양의 생각을 얘기해서 맞는 길로 들어서야지 ‘나중에 잘못된 곳에 도착해도 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만을 혼자 찾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P양이 평소 상대를 대하는 태도나 결혼에 대해

 

“전 그냥 막연하게 남친하고 결혼할 수도 있겠다, 정도였다면 남친은 저랑 결혼하면 완전 감지덕지인 거라고 했어요.”

 

라는 이야기를 한 걸 보면, 상대에겐 P양과 만나거나 결혼하는 게 엄청난 영광인 일이니 절대 상대가 P양을 놓치려고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완전히 푼 채 이 연애는 무엇이 어찌됐든 계속 지속될 거라 안이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연애와 결혼이 그런 형태로 진행되는 거라면 내가 이런 긴 글을 쓸 필요 없이 “딴 거 필요 없이, 나 좋다는 사람 찾아 하고 싶은 대로 연애하세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다음 연애에선, 그게 남의 연애가 아니라 P양의 연애이니, 좀 더 바짝 다가선 채 긴장을 풀지 말고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상대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P양이 관계를 돌보는 것에 소홀히 하면, 훗날 혼자 관계를 돌보다 지친 상대가 등을 돌렸을 때 P양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연애 중 날 좋아하는 만큼 더 노력하고 충성하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라면,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때 P양을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듣기에 좀 불편하겠지만, 난 P양이 이 연애를

 

-동등한 입장에서 연인과 동행한 게 아니라,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오빠의 차를 얻어 타고 온 것.

 

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연애는 이렇게 하면 안 되며, 이것보다 훨씬 더 가깝고 친밀하며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동시에 P양도 덮어두고 넘어가기만 할 게 아니라 되도록 꺼내서 상대와 맞춰봐야 하는, 그런 연애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참고 말 안 하는 노력’말고, ‘말해서 조율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길 바라며, 오늘 매뉴얼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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