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멀쩡한 여자친구 우울증 걸리게 만드는 남자

by 무한 2012. 11. 2.
멀쩡한 여자친구 우울증 걸리게 만드는 남자
지인 하나가 이상한 직장상사 때문에 힘겨워 하고 있다. 그 직장상사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걸 지연씨 마음대로 판단해?
앞으론 다 보고해. 혼자 커트하지 말고. 작은 거 하나라도 다 보고해."



라며 사람들 앞에서 지인을 몰아세웠다. 뭐, 저기까진 그럴 수 있다. 직장사람 대부분이 저 일에 대해 '왜 저런 것 가지고 갈구지?'라며 이해를 못했지만, 상사가 '중요한 일'이라 판단했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며칠 후, 그 상사는 또 

"내가 이런 것까지 다 보고를 받고 결정해 줘야해?
지연씨는 판단할 줄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말해줘야 해?"



라는 얘기를 했다. 2/4박자에서 6/8박자로 장단이 바뀐 것이다. 어느 장단에 맞추든, 결국은 상사 기분에 따라 욕을 먹게 되는 시궁창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저런 상사가 있으면 회사를 나가면 끝이다. 그런데 만약 연애 중 남자친구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 여자 입장에서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는데, 조목조목 따져 연을 끊기는 싫은데다가, 남자친구가 말을 잘 하고 괴상한 논리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어 둘의 관계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면? 늪에 빠져 들어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며 알코올을 친구 삼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구조요청이 내 메일함에 도착했기에, 오늘은 굵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동아줄을 그곳에 던질 예정이다. 꽉 붙잡고 빠져나와 보자.


1. 내가 다 해줄게. 내가 언제나 옆에 있을게.
 

내년, 그러니까 2013년 계획이 뭐냐고 물으면 20대 초반의 대원들은 거창한 목표들을 꺼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초반의 대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들은 소박하지만 좀 더 현실성 있는 계획을 이야기 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한다.

연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연애를 처음 하는 대원들과 몇 번의 이별을 겪은 적 있는 대원들은 연애에 임하는 자세나 연애에 거는 기대가 다르다.

"내가 다 해줄게. 내가 언제나 옆에 있을게."


저 말을 전자는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후자는 '애정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난 연초에, 산책하며 오디오 강의들을 듣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인데, 한 달도 못 가 그 계획을 접었다. 너무 지겨웠기 때문이다. 열정이 불타오르던 초반에는 농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강의를 들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강의뿐만 아니라 산책 자체에 대한 흥이 나지 않았다. 산책이 의무로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내 의지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출퇴근 시간에 영어뉴스를 들으며 공부하겠고 했던 지인 역시 한국 라디오방송으로 갈아탄 것을 봐서는, 꼭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강의 듣는 것으로 산책시간을 활용하겠다는 다짐은 분명 진심이었다. 대개 그렇듯 나 역시 '이건 한 시간짜리니까 몇 주면 다 들을 거고, 그 다음엔 저걸 들어야지. 그럼 두 달이 지나고, 그 다음엔 뭘 듣지?' 하며 열심히 시간까지 맞춰 계획을 짰다. 다음에 들을 강의들까지 모두 mp3로 인코딩 해 저장까지 해 두었다.

만약 저게 내 '다짐'이 아니라 누군가와 한 약속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약속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람은 날 거짓말쟁이로 생각할 것이고, 그는 내게 "그렇게 하겠다는 건 진심이 아니었지?"라며 따질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저 당시 난 분명 '진심'으로 저 계획을 세웠던 건데 말이다.

약속을 남발하고, 쉽게 맹세를 하며, 맹목적인 호의를 베푸는 남자는 위험하다. 그들은 언행일치의 어려움을 모르고 있거나, 앞으로 벌어질 많은 변수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태솔로 여성대원들은 저런 남자에게 아주 쉽게 빠진다. 그의 약속과 맹세와 호의가 구원이라고 착각하며.

결혼 하면 어떻게 살고, 아이는 몇을 낳고, 어떤 가정을 꾸리고, 가족 여행은 어떻게 가고….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즐겁다. 방학을 앞두고 방학계획을 짜는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계획대로 삶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럼 그걸 터놓고 말해서 수정을 하면 되는 건데, 일부 남성대원들은 그 무거운 책임을 떠넘길 궁리만을 한다. 이건 계획한 삶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꺼내는 여자에게, 기한 없는 유예를 걸어 얼마간 버티다가, 결국

"이건 다 네가 날 믿어주지 않아서다."


라며 황당하게도 화를 낸다. 자신은 분명 그러려고 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아 노력 중이었는데, 자꾸 믿지 않고 보채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투다. 여자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믿고 기다리겠다고 하며 남자를 진정시킨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신뢰의 문제가 아닌데 믿고 기다린다고 뭐가 해결 되겠는가? 기한 없는 유예는 길어지고, 그동안 둘은 누구 탓인지에 대한 공방을 주고받는 감정의 소모전만 계속한다. 그러다가 결국 탈진. 


2. 그럼 어쩌라고? 너 하라는 대로 하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사실 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누군가 스스로 알아서 잘 대처했어야 할 문제를 하지 않았을 때, 그에 대한 지적을 한다고 "너 하라는 대로 하라고?"라는 얘기를 듣는 것 말이다. 연애가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대가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친구가 같이 살며 지켜야 할 예절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 샤워기를 쓰고 제자리에 걸어 놓지 않는다거나,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거나, 집을 어지럽히기만 한다거나, 옷을 벗어 아무데나 던져둔다거나, 친구를 데려와 늦게까지 술을 마신다거나 뭐 그런 일을 벌인다. 그에 대한 지적을 그대가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그럼 나보고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하라는 거야?
넌 지금 네가 원하는 것만 다 얘기하고 있잖아.
내가 친구 데려와서 술 마실 때도 넌 불쾌한 표정 짓고 있었지?
걔가 너 화났냐고 묻더라. 꼭 그래야 됐냐?"



저 헛소리에 대처해 줄 다양한 대답들은 금방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일이 연애에서 벌어지면 이상하게도 저런 헛소리에 설득당하는 대원들이 있다.

"노래방에 간 건 친구들이 주도한 거고, 거기에 아는 여자애들이 온 것도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이 그런 거야. 그게 내 잘못이야?
그럼 내가 거기서 여자애들 왔으니까 난 집에 간다고 하고 나와?
넌 왜 너만 생각해? 난 지금도 너랑 통화하느라 모임에 못 어울리고
이렇게 나와서 통화하고 있잖아. 네 감정만 중요해?"



얼마 전 본 '고등학생과 경찰의 대화'라는 동영상에서 고등학생들이 하던 말과 비슷하다. 그 고등학생들은 공원에서 술을 마시다가 경찰에게 걸렸는데, 이렇게 항의했다.

"미성년자가 술을 사는 게 불법이지, 마시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이 술은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공원에서 마신다고 누구한테 피해준 것도 아니고요.
지구대로 가야 된다고요? 그럼 술 말고 먹던 건 마저 다 먹고 가도 되죠?"



그 고등학생들은 20여 분간 안주로 먹던 컵라면과 과자 등을 다 먹고 나서야 경찰차에 탔다. 아는 여자를 흑심을 품고 만나는 게 아니니 괜찮고, 여자친구를 일부러 외롭게 만들 작정으로 친구들과 만난 것이 아니니 괜찮고,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괜찮고, 이런 헛소리에 수긍해 버리면 연애에 피곤함이 가득해진다. '정말 내가 이상한가? 내가 이해심이 없는 건가?'라는 고민만 하며 신경이 바스락 거릴 때까지 고민만 하게 되고 말이다. '상식'을 자기 편한대로 요리해서 사용하는 남자는 여자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3. 채찍 든 남자친구.


'이상한 남자친구'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녀석들은, 채찍을 들고 여자친구를 몰아가는 부류다. 여기에 걸려들면 의학적 도움이 필요해질 정도로 망가질 수 있다. 누구나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인데, 그들은 그 틈이 보이면 목부터 물어버린다.

"것봐. 분명 이번에도 네가 잘못한 거지?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넌 이걸 극복해야 해. 내가 널 챙겨주지 않아서 힘들다는 말 하지 마.
사랑은 마주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야."



그들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한참 덜 떨어지고 투정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정의해 둔 것 같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얘기에 설득당하면 당할수록 더 덜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형편없는 과외선생 같다고 할까.

선생 - 공부를 잘 하려면 문제를 많이 풀어야 해. 이거 다 풀어.
학생 - 다 풀었어요.
선생 - 것봐. 하면 되잖아. 이것도 또 풀어.
학생 - 다 풀었어요. 근데 모르는 문제가 있어요.
선생 - 그걸 알 때 까지 푸는 거야. 계속 풀어봐.
학생 - 그래도 모르겠는데요?
선생 - 그건 네가 문제를 많이 안 풀어봐서 모르는 거야. 더 풀어.
학생 - 언제까지 풀어야 하나요?
선생 - 알 때까지 풀어.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줘야 할 '본분'은 잊은 채, 학생이 해야 할 것만 강조한다. '이상한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연애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여자친구에게만 노력하라고 강요한다. 이해하라고, 견디라고, 더 노력하라고. 그들은 여자친구가 볼멘소리라도 하면,

"네가 지금 징징거린 것 때문에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 되어버렸어.
다시 처음부터 이해하고, 견디고, 노력해! 넌 나아지지 않았어!"



라며 채찍을 휘두른다. 여자친구가 저 구석에 가서 찌그러지기 전까지 여자친구를 밟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정신적인 학대에 여자친구의 영혼은 멍들어 간다. 만신창이가 되어 말줄임표가 잔뜩 포함된 사연을 보낸 대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상대의 채찍질이 겁나 "우리 연애를 위해 네가 하는 건 뭔데? 채찍 든 조련사 역할 말고 하는 게 뭐야?"라고 묻지 못하는 대원들. 그녀들은 오늘도 폭군이 등장하는 악몽을 꾸며 몇 번이나 잠에서 깰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금요사연모음]을 발행해야 했으나,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하고 있다는 메일을 받은 까닭에 이번 사연을 먼저 소개하게 되었다.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사연을 보낸 대원은, 혹시라도, 아주 만약 혹시라도 자신이 사연을 보냈다는 걸 남자친구가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제발 철저하게 각색해 달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했다. 그 글을 읽으며 난, 학대를 당한 동물이 궁지에 몰려 눈만 크게 뜬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남자친구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녀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점쟁이의 노예가 돼버린 아줌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아줌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 점쟁이를 만나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결정을 점쟁이에게 맡겼다. 점쟁이가 하라는 거라면 세상의 상식에 어긋난 일도 했다. 남편과 이혼하라, 가족과 연락을 끊어라, 성매매를 해서 돈을 바쳐라 등. 명문대를 졸업한 그녀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궁금한 독자들은 '신천동 마스크녀'나 '팔선녀와 꼭두각시들'을 검색해 보길 바란다.

그는 그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학대하고 있는 거다. 그가 둘의 관계를 위해 한 게 궤변 말고 뭐가 있는가?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이 동아줄을 잡고 얼른 빠져나오길 권한다. 그 반지하 같이 습하고 어두컴컴한 남자 말고, 따뜻한 햇살과 벅찬 전망을 지닌 남자가 세상엔 많다. 사랑을 속삭이기도 짧은 이 시간을, 왜 거기서 외롭게 견디며 혼자 말라가는가. 다신 돌아갈 생각 없다며 문 쾅 닫고 나오자.



▲ [남자친구의 가벼운 말…] 매뉴얼은 제보자가 악플로 괴로워 하셔서 삭제하였습니다.




<연관글>

연애할 때 꺼내면 헤어지기 쉬운 말들
바람기 있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접근루트
친해지고 싶은 여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찔러보는 남자와 호감 있는 남자 뭐가 다를까?
앓게되면 괴로운 병, 연애 조급증


<추천글>

유부남과 '진짜사랑'한다던 동네 누나
엄마가 신뢰하는 박사님과 냉장고 이야기
공원에서 돈 뺏긴 동생을 위한 형의 복수
새벽 5시, 여자에게 "나야..."라는 전화를 받다
컴팩트 디카를 산 사람들이 DSLR로 가는 이유
카카오뷰에서 받아보는 노멀로그 새 글과 연관 글! "여기"를 눌러주세요.

 새 글과 연관 글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