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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등산용 로프를 들고 화장실 변기에 앉은 Y씨에게

by 무한 2012. 6. 30.
등산용 로프를 들고 화장실 변기에 앉은 Y씨에게
전에 다니던 회사에 고양이가 있었다. 거리에서 돌아다니던 녀석이었는데, 소품실 누나가 밥을 챙겨줬더니 회사에 눌러 앉은 녀석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나비였다.

난 나비를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다. 소품실 누나가 만질 때는 발랑, 누워서 눈까지 감던 녀석이 내가 만지려고 하면 오싹한 눈으로 경계하며 날 쳐다봤다.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몇 번 쓰다듬은 적은 있다. 나비는 기분이 좋을 때면 내 앞에서도 발랑, 누웠는데(그때도 눈은 감지 않았다) 그 때 얼른 몇 번 쓰다듬었다. 쓰다듬다가 기겁을 한 적도 있다. 나비가 몸을 반쯤 일으켜 내 손을 핥았을 때다. 고양이 혀의 감촉을 처음 느껴본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강아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칫솔로 문지르는 듯한 그 까칠함에 난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을 쳤다.

"겁먹지 마. 겁먹으면 얘도 알아. 그냥 귀여운 인형이라 생각하고 쓰다듬어."


소품실 누나가 해 준 조언이다. 하지만 난 저 조언을 따를 수 없었다. 몇 년 전 친구와 월미도에 함께 놀러갔을 때, 친구가 졸고 있는 고양이를 귀엽다며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그 손길을 즐기는 듯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친구의 손을 할퀴고 도망갔다. 그 할퀸 자국에서 흘러 뚝뚝, 떨어지던 피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기에 난 나비를 '귀여운 인형'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1. 고양이 같은 여자.


나비는 심심할 때면 내게 다가와 옆구리로 내 종아리를 쓱, 훑고 지나갔다. 뭔갈 요구하는 것 같아 쳐다보면, 나비는 그런 적 없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쿠션을 찾아가 눕거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친해질 생각으로 고양이 간식도 몇 번 사다 준 적 있다. 하지만 나비는 '앙냥냥냥'하는 소리를 내며 간식을 먹을 뿐, 다 먹고 난 뒤에는 나와 볼 일이 없는 것처럼 아무데로나 가 버렸다.

Y씨의 사연에 등장하는 여성분은 나비의 저런 모습을 참 많이 닮아 있다.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넌 아직 나에게는 수많은 꼬마 애들과 똑같은 꼬마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하지도 않고 너도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네게 그 많은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거든.
그러나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하게 되는 거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네게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Y씨에게 그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지만, 지금 그녀에게 Y씨는 많은 남자들 중 하나다. 얼마 전 고민상담을 해 온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같은 회사의 여직원과 '잘 되어가는 관계'라고 생각했던 지인은 상대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 이런 얘기를 했다.

"걔가 다른 남자직원들한테 팔짱끼고, 약속 잡고 그러는 거 보다가
못 견디겠어서, 점심 먹고 얘기를 했지. 우리 무슨 관계냐고.
그랬더니, 친구 아니었냐고 되묻더라. 친구.
참 편해. 내꺼 다 퍼줄 땐 연인처럼 대하더니,
내가 잘못 안 거냐? 친구끼리도 데이트 하고, 팥빙수 먹여주고,
기대고, 팔짱끼고, 포옹하고, 다 그럴 수 있는 건가?
암튼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냐.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왔지.
난 세상 무너진 것같은 기분도 들고, 내가 뭐에 홀린건가 싶어서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걔는 웃으면서 다른 직원들이랑 농담하고, 
나랑 눈 마주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더라.
저녁에 난 좀 혼란스럽다고 톡 보내니까, 부담스럽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거면 말하래. 그럼 친구 안 한다고."



사람 미치는 거다. 그나마 지인은 '잘 되어 관계'라고 생각했으니 저 정도지만, Y씨는 식만 안 올린 부부처럼 지내지 않았는가. 그렇게 지내다 상대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한 뒤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선 멀쩡한 게 이상한 거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Y씨의 속마음을 눈치 챈 상대는, 지금도 여러 소개팅을 전전하다가, 진전이 없어 심심할 때면 Y씨를 툭, 건드린다. 정말 고양이 같은 여자다.

그런데 이게 전부는 아니다.


2. 겁먹지 마. 겁먹으면 얘도 알아.


상대가 Y씨에게 정착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Y씨는 상대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다. 상대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Y씨를 소개하고, 오빠 부부와 식사를 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Y씨는 충실히 참했다. 그런데 그냥 충실할 뿐이었다. 상대가 디딤돌을 놓았지만, 그 디딤돌을 밟고 올라서 '다음 이야기'으로 이어나갈 저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 결혼은 언제 하는가?
- 자리 잡으면.
우리 여행은 언제 갈 건가?
- 돈 좀 벌고 나서.
우리 제대로 된 데이트는 언제?
- 지금처럼 집에서 하는 데이트도 나쁘진 않음. 
  제대로 된 데이트는 자리 잡고 돈 벌어 여유로워지면.
이러다 나 놓치면 어쩌려고?
- 다른 남자와 비교해 보고 싶으면 비교해도 됨.
  그런데 비교하느라 시간 보내봐야 나중에 후회할 것임.



미안하지만 저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상대는 내가 Y씨가 챙겨주는 대로 만족해야 하는 애완 고양이가 아니다. Y씨는 상대가 집을 나가면 '길고양이' 신세가 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미루지 않고 현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같은 눈높이의 사람도 많단 얘기다. 

"끝가지 함께 하기 위해서는,
만나다가 시간 끌지 않고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결혼만이 헤어지지 않음의 보증수표가 되는 건가요?
그냥 소소하게 잘 지내는 건 무리인 건가요?"



흥분을 좀 가라 앉히고 생각해 보자. Y씨는 소소하게 잘 지내서 문제가 된 게 아니고, 상대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기에 문제가 된 거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Y씨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확신을 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2년 안에 결판 낼 거야. 그 때까지만 믿고 기다려줘."


라고 말하면, 단군신화의 곰처럼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다 잘 될거야. 기다려봐. 비교하려면 비교해. 나만한 남자 없음."


이라고 말하는데, 뭘 바라보며 언제까지 기다리겠는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 없음에 Y씨가 먼저 겁을 먹었고, 상대는 Y씨가 겁먹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고양이 같은 그녀는 아무데로나 가 버리기로 한 것이다.


3. 그냥 귀여운 인형이라 생각하고 쓰다듬어.


난 나비는 제대로 만져본 적 없지만, 나비의 자식인 '깜순이'는 실컷 만졌다. 녀석이 어렸으니, 할퀴어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는 생각으로 만졌던 것이다. 다행이 녀석은 순했고, 손을 할퀴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난 소품실 누나의 말대로, 깜순이를 '귀여운 인형'이라 생각하며 쓰다듬을 수 있었다.

Y씨가 상대를 잡고 싶은 거라면, 난 먼저 상대를 사랑하길 권해주고 싶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호기심에 불타는 숯을 집으려 할 때 그냥 두지 않는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경고하는 것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난 충분히 경고했고 너에게 선택권을 줬으니, 화상을 입으면 네 책임이야."


이라고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상대로 하여금 앞으로 내 말에 더욱 잘 복종하며, 날 아쉬워하게 만들기 위한 포석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쓰다듬을 줄 아는 태도를 가지길 권해주고 싶다. 너도 맛 좀 보라며 찌르고, 상대가 발끈하면 잡아떼고, 책임을 회피하고, 현재 속마음은 어떤가 알아보려고 떠보고, 날 선 말을 던지고, 지기 싫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 하고, 우리 그럴 나이는 지나지 않았는가.

내가 참 잘난 놈인데,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좀 시궁창 같은 현실에 살고 있다면 그 모습을 그대로 상대에게 말해주자. 연애라는 게, 나 혼자 다 해결해서 상대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다. 연인이라면 같이 고민하고 함께 계획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Y씨는 혼자 고민하고, 상대에게는 좀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내가 다 고민하며 헤쳐나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지금 상황이 이렇다고 떠나가 버리면, 너는 나중에 후회할 거란 얘기만 한단 얘기다.

이렇게 얘길 하면, 상대에게 "나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그래도 괜찮겠어?"라고 허락을 구하려는 대원들이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말길 바란다. 다 털어 놓고 함께 고민하라는 얘기지, 비겁하게 자신의 한계점을 통보해 상대의 사인을 받아내란 얘기는 아니다.


우리, 그동안 나아갈 길이 훤히 보여서 여기까지 편안하게 온 것은 아니잖은가. 생각지 못했던 사건도 일어나고, 계획했던 것이 틀어지기도 하고, 우연히 뭔가가 끼어들기도 하고, 예상했던 것들이 뒤집어 지기도 하면서 지금 여기 서 있는 것 아닌가.

징기스칸이 포로로 잡혔을 때 목에 칼을 쓰고 탈출하지 않았다면? 조앤 K. 롤링이 여러 출판사에서 <해리포터>의 출판을 거부당했을 때 그대로 포기했다면?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 이젠 끝이라며 등산용 로프를 찾았다면?

23세 사업 실패, 24세 주의원 선거 실패, 25세 다시 시작한 사업 파산, 29세 주의회 대변인 출마해 실패, 32세 정/부통령 선거 실패, 35세 연방 하원의원 실패, 40세 연방 하원의원 재선 실패, 46세 상원의원선거 실패, 48세 부통령 지명전 실패, 50세 상원의원 또 실패, 이런 경력을 가진 링컨은 51세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된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나는 선거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내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요리를 주문해 실컷 먹었다.
그리고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말끔하게 다듬고, 기름도 듬뿍 발랐다.
이제 아무도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이제 곧바로 다시 시작했으니까."



맛있는 요리부터 실컷 먹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 마음으로 일어서 보자.



"나 이제 안 보겠단 말이야?" 너 안 보면 내가 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안 봐.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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