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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과여행/물고기가좋다

큰밀잠자리의 우화 응원기

by 무한 2011. 8. 5.
큰밀잠자리의 우화 응원기
파브르가 오래 전 세상을 떴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면, 안곡습지공원(우리 동네에 있는 습지공원)으로 초대해,

무한 - 곤충의 몸을 3등분 하면?
파브르 - 머리, 가슴, 배!
무한 - 틀렸음. 곤충의 몸을 3등분 하면, 곤충이 죽음ㅋㅋㅋㅋ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아, 그리고

무한 - 님 이름이 '장 앙리 파브르'아님?
파브르 - 맞음.
무한 - 그럼 장씨임? 나도 장씬데. 어디 장씨? 난 안동 장씨.



이런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거고 말이다. 자, 허튼소리는 이쯤 하고,




지난 8월 2일에 난, '왕잠자리, 큰밀잠자리, 밀잠자리, 두점박이좀잠자리' 수채(유충)를 채집했다. 사진에 보이는 녀석은 그 중 '큰밀잠자리 수채'다.

큰밀잠자리라 하면, 잠자리의 세계에서 '이사'정도의 직급을 가진 잠자리다. 물론, 밀잠자리 위로 '회장'이라 할 수 있는 '왕잠자리'와 '사장'이라 할 수 있는 '장수잠자리' 등이 있긴 하다. 하지만 '주임'이나 '대리'라 할 수 있는 '된장잠자리'나 '고추잠자리'에 비하면 분명 높은 직급이다. (밀잠자리는 실제로 '된장잠자리'나 '고추잠자리'를 잡아먹기도 한다.)

더군다나 큰밀잠자리의 성충은 특유의 '예민함' 때문에, 필드에서 채집하기가 어렵다. 다른 잠자리들이 눈앞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려도 '응? 뭐지?'라며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과 달리, 녀석은 작은 소리만 나도 일단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다.

성충은 그렇게 예민하지만, 수채는 그렇지 않았다. 뜰채 질을 몇 번 하니 쉽게 잡혔다. 너무 쉽게 잡히기도 했고, 손톱만한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 사실 처음엔 '큰밀잠자리'의 수채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고추잠자리나 된장잠자리의 수채이겠거니 했는데, 잠자리 전문가 분들에게 동정을 부탁하니 '큰밀잠자리 수채'라고 했다.

큰밀잠자리 수채라니! 로또에 당첨된 마음으로, 녀석을 '단독사육통'으로 옮겼다. 그렇게 특별 사육에 들어간 지 삼일 째 되던 날 새벽,




잘 크고 있나 한 번 볼까, 라는 생각으로 사육통을 살피는데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탈출한 건 아닌지 사육통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다신, 너 같은 수채 만날 수 없을 거야. 행복했던 기억만 가져가렴...'

이라며 애써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응?'

사육통 중앙, 녀석들의 우화를 위해 만들어 놓은 '루바망 피라미드'에 뭔가가 매달려 있었다.

'우...우화하고 있잖아!'

너무 기쁜 나머지, 자고 있던 간디(애완견)를 깨웠다. 간디는 내가 가리키고 있는 잠자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가와 내 발만 두 번 핥으며 "발 씻고 얼른 자라."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다시 안방으로 가 버렸다.




아직 수채에서 몸을 다 빼지 못한 저 녀석은, 복근운동을 하는 것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몸을 거의 다 뺀 상황. 사진을 찍느라 플래시를 터트릴 때 마다 녀석은 움찔, 거리며,

"야, 눈부시잖아!"

라는 항의를 해 댔다.




녀석은 수채에서 완전히 몸을 빼내며, 웃-차, 하는 느낌으로 수채에 매달렸다.

'어? 그런데 머리 뒤에 저 초록색 혹 같은 건 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의 우화시에도  저렇게 낯선 모양이 나타나면 '우화부전'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불길한 예감 프로세서'가 오작동 한 것이길 바라며 녀석의 우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위의 사진과 바로 앞에 있는 사진을 비교해 보면, 배(꼬리)를 펴기 위해 힘을 한껏 줘 구부린 모습과 어느 정도 날개가 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배(꼬리)는 완전히 펴졌고, 날개도 아까보다 더 펴졌다. 녀석의 머리 뒤에 달린 초록색 물체가 뭔지 유심히 들여다보니, '혹'이 아니라 '물방울'같았다. 그래서 면봉을 녀석의 머리 뒤로 살짝 갖다 대 보았다.




좋았어! 예상대로 머리 뒤에 있던 물체는 '물방울'이었다. 위의 사진은 면봉으로 그 물방울을 닦아 낸 후의 모습이다.

초록 물방울 문제는 해결 되었지만, 수채가 루바망에 완전히 고정되지 못하고 다리 하나로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렇게 버티다 수채의 다리가 루바망을 놓치면, 아래 사육통에 있는 물로 떨어져 버리는 상황. 수채를 좀 움직여 다른 팔도 고정시켜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앞서 등장했던 사진들과 비교해 보면 몸에 있는 무늬들이 진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저렇게 한참을 매달려 있던 녀석은,

촤락!

하는 소리를 내며,




날개를 양 옆으로 폈다.

'날개가 아직 덜 마른 것 같은데, 왜 날개를 폈지?'

다시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다. 웹에서 다른 잠자리들의 우화 사진을 찾아봤지만 저런 모양으로 날개를 편 잠자리를 하나도 없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녀석의 날개는 저 상태에서 더 펴지지 않았다.

'괜찮아. 수고했어. 괜찮아.'

나에게도 녀석의 날개처럼 '정상적으로 펴지지 못한' 마음이 있다. 그래서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이란 의미의 'normal'을 추구하며, 블로그의 이름도 '노멀로그'라고 지었다.

'괜찮아. 수고했어. 괜찮아.'

그래서 한참을 더, 응원했던 것 같다.




날개를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지, 녀석은 계속 수채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매달려 있다 수채가 루바망에서 떨어지면 녀석도 함께 물속으로 떨어질 수 있기에, 안전한 반대편으로 옮겨 주었다.

수고했어, 큰밀잠자리.




녀석이 벗고 나온 수채의 탈피각이다. 때 묻은 저 탈피각을 벗고 나오며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을 텐데, 힘차게 날개 짓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녀석은 오늘 새벽 삶의 끈을 놓았다.

내 탓인 것 같다. 우화부전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라 알고 있는데, 우화 할 때 내가 사육통을 건드린 것이나 사진을 찍느라 터트린 플래시가 녀석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같다. 녀석이 우화하는 모습을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진을 찍는다며 요란을 떨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 녀석의 '우화부전'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 미안하다.


어익후, 이거 쓰다 보니 일기장에 적어야 하는 참회록을 '잠자리 이야기'에 옮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여린마음동호회 회원들에게 "마음에 우화부전이 있는 저도 잘 살고 있습니다. 힘내자구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는 얘기로 서둘러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수고했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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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로그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사정 상 작게 올리고 있습니다. 큰 사진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노멀로그 갤러리(http://normalog.blog.me/)를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노멀로그 갤러리엔 노멀로그에 올라오지 않은 사진들도 올라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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