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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싸운 적도 없는데 갑자기 찾아온 이별, 이유는?

by 무한 2015. 4. 30.

안녕 H양. 내가 회사를 다닐 때 K과장이란 분이 있었어. 나이는 나보다 일곱 살 정도 많았던 것 같은데, 내 회사생활에 대한 여러 부분들을 지적하신 분이지.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면 사람들이 보니까 안 보이는 곳에서 피워라."

"점심시간에 회사 밖으로 사진 찍으러 나가지 마라."

"회식 때 네가 제일 막내니까 사람들 술 따라 드려라."

"내가 대리비 줄 테니까 차 핑계대지 말고 회식 때 술 마셔라."

"차는 주차장 제일 끝 쪽 개집 쪽에 세워라."

 

K과장이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었어. 오히려 내가 신제품 아이디어를 내면 가장 귀 기울여 듣곤 실제로 만들어 주신 분이고, 우리 집에 일이 있었을 때에도 퇴근 후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주셨던 분이지. 난 고양동에서 제일 유명한 알곱창도 이 분 덕분에 처음 먹어봤고, 생일선물로 이분에게 루어낚싯대도 받았어. 요약하자면, 날 제일 갈구려고 한 건 K과장이지만 날 가장 잘 대해준 사람도 K과장이란 말이지.

 

 

 

 

1. 진지함과 고지식함.

 

K과장과 내가 완전히 친해질 수 없었던 것엔 직급과 나이차이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K과장의 진지함과 고지식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는 뭐랄까, 아무도 이상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분을, 혼자 그럴 거라 지레 짐작하며 조심하는 사람이었거든.

 

내가 철없이 굴어서 K과장이 그 부분을 지적했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당시의 나를 지금의 내가 돌아봐도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이건 사실 경험해 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한데, K과장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꽤 많이 있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예의범절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정작 자신은 개차반처럼 굴거나 예의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으면서, 남에게는 엄격하게 그 이상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

 

K과장이 그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어. 그는 전날 과음해서 결근하는 일이 있고, 또 식당이모에게도 반말을 섞어 쓰며, 어느 땐 본인도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워댔거든. 그렇게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선 관대하면서, 남에게만 엄격한 거야.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K과장이 나쁜 사람이었던 것은 절대 아니야. 좀, 함께하기 피곤한 사람이었지.

 

이렇게 생각해보면 될 것 같아.

 

"시간으로는 점심시간이 맞지만 아직 일 진행이 더디다. 이런 와중에 밥이 넘어가냐. 일을 어느 정도 끝내 놓고 밥을 먹어야 한다. 너도 그때까지는 굶어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 거야. 저 말만 보면 엄청 투철한 애사심을 가지고 있으며 본인이 맡은 일에 대해선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 저러다가도 본인이 비뚤어지고 싶으면 그냥 회사 일에서 손 놓고 시간만 보내기도 하는 사람이거든. 이런 모순 없이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남에게까지 강요하면 남도 반드시 피곤해지는 법이고 말이야.

 

H양에게서 K과장의 모습이 보인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그랬다가는 H양의 모든 분노가 나를 향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냥, '내가 저랬던 것은 아닌가'하는 걸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A4용지에 선을 그어 반으로 나눈 뒤,

 

A.내가 남친에게 기대하고 요구했던 것.

B.남친이 내게 기대하고 요구했던 것.

 

이렇게 두 가지를 천천히 적어가 봐. 그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A가 B보다 많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걸 두고

 

"그건, 저는 문제없이 잘 했고, 남친이 잘못한 게 더 많아서 그런 것일 수 있잖아요?"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H양의 사연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해. 만약 남친이 하루 종일 연락도 안 한 거라면 그건 기본적인 의무도 지키지 않은 것이기에 전자에 해당할 수 있지만, 연락을 잘 하던 와중에 점심때 밥 맛있게 먹었냐고 안 물어봤기 때문에 지적을 당해야 하는 건 남친의 무관심이 아니라 'H양의 불만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거든. 남친이 H양과 사귀며 "미안해."를 몇 번 말해야 했나, 그리고 그게 정말 누가 봐도 남친이 잘못해서 해야 했던 사과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라.

 

 

2.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연애?

 

사귀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는 대원들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사연에서도 전투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 연락 다 끊고 남남처럼 등 돌린 큰 '전쟁'이 없었을 뿐이지, 불만족과 서운함, 실망과 집착 등의 문제로 감정이 상했던 부분은 곳곳에 담겨 있거든.

 

아래의 대화를 봐봐

 

여친 - 내가 안 궁금한가? 점심 먹었냐고 묻는 카톡도 없네.

남친 - 아, 미안해. 정리가 이제 끝났어. 내가 왜 안 궁금하겠어~

여친 - 바쁜 거 알아. 흠.. 그래도 카톡 하나 남겨주지….

남친 - 미안~ 내가 더 잘하고 노력할게~!

여친 - 응응. 앞으로 조금만 더 신경써주세요~

 

위와 같은 갈등도 분명 계속되면 피로가 축적되거든. 그리고 저렇게 넘어갔다고 해서 전부 다 '잘 넘어간 것'이 아니야. 내가 보기엔 H양의 남친에게도

 

'사과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얘기해야 하는 순간에도 사과만 하는 남자.'

 

라는 단점이 있는데, 이건 '한 번도 싸우지 않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둘의 관계에서 '치료약'이 아닌 '진통제'만 복용한 결과를 낳곤 해. 늘 미안하단 얘기로 순간의 갈등만 잠재울 뿐이니까, H양의 불만족도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H양 남친은 대부분의 일들을 '의무'로 느끼게 되거든.

 

H양의 남친은 어려운 건 어렵다고 말하고,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말하며, 억울한 부분이 있으면 억울하다고 말했어야 해. 그런데 그는 H양이 불만을 이야기 하면 무조건 '미안해'를 앞세웠고, 그 결과 축적된 피로감으로 인해

 

"이제 내겐 너를 좋아하는 감정보다, 미안한 감정이 커진 것 같아."

 

라는 이야기를 하고 만 거지.

 

더불어 그는 연애가 처음인데다 마음이 좀 여린 편이었는데, H양이 '애매한 요구'들을 말해서 더욱 충격과 공포에 빠진 것 같기도 해. 내가 둘의 카톡대화를 보며 참 답답했던 건, H양이 계속

 

"앞으로 내게 조금만 더 신경써주면 돼요~"

 

라고 말한 부분이야. H양은 남친이 '미안해'를 앞세울 때면 몇 번이고 저런 얘기를 하는데, 저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분명하게 알기 어려운 얘기일 뿐만 아니라, 저 말 자체로도 부담스러운 말이거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봐. 남친이 H양에게

 

"앞으로 내게 조금만 더 신경써주면 돼요."

"나 좀 있으면 괜찮아 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바쁜 거 모르는 건 아닌데, 오늘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나도 좀 사랑 받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연락 기다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 알지만 서운하네. 앞으로 큰 기대는 안 하도록 해볼게."

 

라는 말들을 해대면, 좀 숨막힐 것 같지 않아? 주3회 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봐. 그러면 H양도 이별을 생각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갖자거나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 '큰 싸움'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런 감정의 소모전으로 인해 지쳐버릴 것 같지 않아?

 

 

3. 안정적인 연애를 위해 족쇄를 채울 채울까?

 

H양이 남친에게 한 말 중 내게 경악스럽게 읽힌 이야기는,

 

"익숙하고 편안해졌다고, 조금 귀찮아졌다고 소중함을 잊으면 어떡하니.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그래?"

"이번 주까지야. 이번 주까지 돌아오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가자."

"나에게 이야길 해야지. 나에게 기다려 달라고라도 했어야지. 여자친구는 너의 두려움과 지침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라는 부분이었어. 물론 이별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 말이 되든 안 되든 그 어떤 얘기라도 다 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난 저게 평소 H양이 가지고 있던 연애관이 드러난 말이라고 생각하거든.

 

이렇게 말해서 좀 미안하지만, 저 말들에선 일종의 '극성 엄마'같은 느낌이 들어. 아이를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휘두르고, 또 아이의 진로까지도 자신이 다 정하려는 그런 느낌말이야. 저런 모습은 H양이 연애를 할 때에도 나타났어. 아주 작은 불안이나 긴장마저도 없어져야 그게 '안정적인 연애'인 것이라고 여기며 상대를 담금질하는 모습으로 말이야.

 

그런 연애관에선 종종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곤 해. 그건 바로

 

'이쪽의 믿음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까지도 상대에게 채우라고 요구하는 태도'

 

를 보인다는 거야. 생각해 봐봐. 내가 H양의 남자친구인데, 오늘 다음 달 초에 이민 가는 친구를 만난다고 했어. 나는 H양에게 6시쯤 퇴근한다는 연락을 했고, 7시쯤 친구를 만났다고 연락을 내가 했지. 그러고는 한참동안 연락이 없다가, 12시가 다 되어서 들어간다는 연락을 했어. 그랬다면, 어때? 이 정도로 연락을 하면 이해해 줄 수 있겠어?

 

위와 같은 정도의 연락이라면 '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저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자리를 옮길 때도 연락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밥집에서 술집으로 옮겼다는 걸 말했어야 한다고. 그들보다 좀 더 엄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인원이 추가되거나, 밥집과 술집 사이에 당구장을 갔으면 그것도 말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해. 그럼 50미터 이상 이동할 때마다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면, 그들이 안심할까?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 실시간으로 어디 있는지 조회할 수 있도록 해주면, 그들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까?

 

아니야. 그래도 불안해 해. 믿음의 부재로 인한 불안은 그 어떤 증거를 가져다 채워도 불신이 남게 되거든. 어떤 숫자든 거기에 0을 곱하면 0이 되고 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실시간으로 상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되어도, 그들은

 

"무슨 얘기를 그렇게 그 친구와 오랫동안 하는 거냐."

"나랑 만날 땐 10시 넘으면 피곤하다고 하더니, 친구랑 만날 땐 피곤한 걸 못 느끼냐."

"'나 지금 들어가'라는 연락이 무슨 소용 있냐. 내가 연락을 하라고 했지 언제 보고를 하라고 했냐."

"너는 그 친구와 만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겠지만, 난 그동안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넌 날 외롭게 만들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 아마 24시간 함께 붙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삐칠 거야. 왜 자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 TV를 보고 있는 거냐면서 말이야. 난 H양이 이런 '불안의 늪'에 빠져있었던 거라 생각해.

 

 

 

끝으로 하나 더. H양이 한 "여자친구는 너의 두려움과 지침을 안아줄 수 있는…."이라는 말은 공허해. 남친이 회사 일로 걱정할 때 H양은 단순히 이직을 권할 뿐이었잖아. 그가 왜 힘들어 했는지를 육하원칙에 따라 이야기 할 수 있어? 남친이 회사에서 누구와 가장 친한지, 남친 회사 책상 위에는 무슨 물건이 있는지 등을 H양은 알아? 모르잖아.

 

서로를 알아가며 함께 발전하고 위로와 도움이 되는 안정적인 연애? 말은 좋지. 근데 그런 연애를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카페 가서 둘이 롤링페이퍼 쓰면 자연히 그렇게 되나? 위로와 도움은 이모티콘 보내줄 때 생기는 건가? 발전은 둘이 만나 자격증 따는 얘기 같은 걸 하면 그게 발전인가? 안정적인 건 서로의 얼굴만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안정적인 건가? H양이 바랐던 연애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하는 연애가 아니라, 희희희희(喜喜喜喜)의 연애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해. 그랬기 때문에 H양은 힘들고, 또 남친은 지쳤던 거고. 연애 중 H양이 남친에게 '두려움과 지침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습들을 보여줬는지, 그것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정리하자면, 이번 연애에서 H양은 '생활과 연애'의 밸런스가 무너졌던 것 같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럴 수 있어. 나도 지금은 멀쩡하지만,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택배로 받기로 한 날엔 문 밖에서 '끼이익'하며 택배차 문 열리는 소리만 나도 내가 기다리는 택배차인지 확인하거든. 2시부터 6시까지 그 소리만 나면 뭔가를 하다가도 무조건 발코니로 가서 확인해. 때문에 하던 일은 일대로 안 되고, 내가 기다리던 택배차가 아니면 실망하지. 그러다 택배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조회를 하기도 하고, 거기에 나온 기사에게 전화를 해볼까 몇 번이나 갈등을 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렇게 내가 택배를 기다릴 때처럼 H양도 '안정적인 연애'만을 생각하며 연애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아. 뿌리를 깊게, 멀리까지 뻗어 놓으면 바람 걱정도 없을 뿐더러 재촉하지 않아도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될 텐데, 안타깝게도 H양은 빨리 열매가 안 달린다는 것에 불안해했던 것 같아. 둘이 아직 계절 하나를 함께 보내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이번 연애는 이별 후 H양의 확인사살이 수차례 있었던 까닭에 재회의 가능성은 내가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딸 확률보다 낮은 것 같고, 다음 번 연애에서는 전력질주에 목숨 걸기 보다 상대와 함께 발맞춰 걸을 수 있길 기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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