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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4)

첫사랑의 기억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여자 외 1편

by 무한 2014. 2. 28.
남자가 무서워 긴 연애를 못 하는 여자 외 1편
지난 달 중순, 일본인 오노다 히로씨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극우 활동가인 그를 한국인인 내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혼자서 29년간 전투를 계속해 왔다는 점이 흥미롭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는 1944년, 일본군 소위로 필리핀 근처에 섬에 파견되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미군의 공격을 받아 부대원의 8할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 그와 그의 부대원들은 정글에 숨어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에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은 정글에 숨어 있었기에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두 달 정도 지나 미군이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나머지 부대원 대부분이 자포자기 한 채 투항할 때에도, 그는 이것이 미군의 속임수라 생각해 투항하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난 후에는, 투항했던 그의 부대원과 가족들까지 섬에 와서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이것 역시 미군의 심리전이라 생각하며 투항하지 않았다. 가족들까지도 미군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불러내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1950년 이후로는 연례행사처럼 일본인들이 섬에 와서 그를 불렀다.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려고 신문과 잡지, 편지 등을 정글에 놔두기도 했는데, 그는 그걸 함정으로 여기며 접근하지 않았다. 15년이 더 지난 후에는 그의 동창생들까지 그를 찾으러 섬에 왔다. 하지만 그는 역시 투항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옛 상관이었던 일본인이 찾아가 설득을 한 뒤에야 그는 투항하였다. 전쟁은 그의 나이 스물 셋에 진작 끝났는데, '전시상황'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나 홀로 전투'를 하느라, 그는 52세가 되어서야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 첫사랑의 기억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여자.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 일본군 소위와 L양은 비슷하다. 일본군 소위는 29년의 세월을 버린 대신 명예를 얻긴 했다. 일본에서 그는 스타가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이후 40여 년 간 우익활동을 했다. 29년간 숨어 살며 그는 현지인을 죽이고, 필리핀 경찰과 주둔 미군까지 살해했지만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 없이 일본의 보호 아래 영웅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여하튼 저 일본군 소위는 29년을 저런 방식으로라도 보상받기는 했다. 그런데 L양이 만약 지금처럼 29년을 살면, 그 대가를 누구에게 보상 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온 책임을 누군가와 나눠 질 수라도 있을까? L양의 첫사랑이라는 그 남자가 보상해 줄까? L양이 29년간 폐허가 된 첫사랑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들으면, 그가 감동해 이후의 삶을 모두 책임져 주겠다며 나설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그 사람은 현재 L양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까맣게 잊은 채 '누가 내 얘기 하나?'하며 귀나 후비고 있을 것이다.

"전 불행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과 함께한 추억의 울타리 속에서 살면 되니까.
그렇게 사는 건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아니고, 선을 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잊지 못할 바에야 그렇게라도 울타리를 치면서 사는 게 더 낫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 청춘이 한 50년쯤 되는 거라면, 뚝 잘라서 절반 정도는 그렇게 감정에 취한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 하지만 L양의 20대는 벌써 절반이 지나갔고, 이제 떡국을 다섯 번만 더 먹으면 서른에 접어들지 않는가. 낭만이나 미련, 아련함 등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다 아는데, 내 얘기는, 이렇게 20대를 다 보내고 나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L양이 져야 한다는 거다.

L양의 의미부여와 '낯설게 보기'의 방법도 수준급이지만, 사실 문학소녀들에 비하면 L양의 그것은 조족지혈이다. 난 많은 문학소녀를 만나봤는데, 그 중엔 아예 외계에서 온 듯한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음의 섬에 가 보았다는 소녀, 짝사랑하던 남자의 입에서 피어난 꽃을 보았다는 소녀, 첫사랑의 이름만을 적으며 노트를 몇 권을 채웠다던 소녀 등,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난 그녀들이 최소한 땅에 발은 딛고 살 수 있게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혼자서만 세상의 이방인인 듯이 구는 그녀들에게 겨우 닻을 달아줄 수 있었다. 지금은 다들 애 엄마가 되었을 텐데, 아이를 재우다가 그때의 흑역사가 떠올라 이불을 걷어찰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면 저에게 이런 상처들이 있다는 것, 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그에게 알려야 할까요? 저는 이 기억이 떠올라 패닉에 빠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결책이 없다면 저는 이제 정말 연애를 포기하려 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고요."



그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기억을 잊으려 혼자 보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오로지 L양의 삶을 위해 일 년 정도를 살아보길 권한다. 연애나 연애에 대한 기억과 관련 없이 L양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첫사랑이 시작되기 전 L양이 잘 살아왔던 것처럼. 그러면 전쟁 같던 이별이 오래 전에 끝났다는 걸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고,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땐 온전한 L양의 모습으로 그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키스 때문에 망한 남자.


김형. 내가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어. 김형 사랑니 있지? 앞으로 1주일에 한 번 그녀를 만나고, 그녀를 만날 때마다 사랑니를 하나씩 뽑아. 이것만으로도 김형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어. 놀랍지 않아?

김형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하려고 한다는 거거든. 이거 썸을 타는 사이니까 그냥 넘길 수 있는 거지, 썸 타는 사이 아니었으면 추행으로 신고 받아 잡혀갔어도 이상할 게 없는 거야. 난 김형이 왜 이렇게 키스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어. 키스를 시도하지 않고서는 그 만남을 둘이 온전하게 보냈다는 느낌 같은 게 전혀 들지 않는 거야?

난 남자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보는 건데도

'이 남자는 단순히 스킨십 하려고 저 여자를 만나는 건가?'


하는 생각밖에 들질 않아. 물론 초반엔 그녀도 받아줬지. 썸을 타는 와중이었으니 자연히 진도를 나갈 수 있잖아. 그런데 만나다 보니, 김형과의 만남엔 딱 세 가지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돼.

'밥 아니면 술, 그리고 모텔.'


이런 관계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 이런 관계에서 결혼까지 꿈꿀 수 있겠어? 당연히 없지. 그래서 그녀도 정신을 차려. 그러자 김형은 불안해지지. 그래서

"오늘은 왜 연락도 없어?"


따위의 말까지 하게 돼. 김형은 이걸 두고 '살짝 투정을 부렸다'고 표현하더라? 저게 '살짝'이면, 제대로 투정부리면 대체 어느 정도가 되는 거야? 여하튼 이렇게 김형이 집착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녀가 김형을 밀어내. 하지만 김형은 그녀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매달리지. 그녀의 집 앞에까지 찾아가 잠깐 만나달라는 얘기까지 하면서 말야.

그녀가 강하게 밀어내자 김형은 연락을 끊어. 그녀에게 축하해줄 일이 있을 때 축하를 해 주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서. 아마 그러는 동안 그녀도 '내가 너무 모질었나?'하는 생각을 했을 거야. 김형이 악한 사람이라서 집착을 했던 건 아니었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다시 연락을 해 김형과 만나게 되지.

그렇게 다시 만난 날을 봐봐. 난 저녁 11시까지 둘이 나눈 이야기가 참 좋았다고 생각했거든. 덤덤하게 속내를 털어 놓기도 하고, 그녀 역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하며 훈훈한 대화를 만들어가지. 그런데 11시 이후 술집을 나와서 김형은 뭘 했어? 또 키스하려고 달려들었잖아. 그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하나야.

'얜 진짜 어쩔 수 없는 애구나.'


다시 그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러다 그녀의 생일이 되었을 때 다시 연락이 닿아. 난 여기서라도 제발 김형이 케이크나 생일선물 정도만 하고 물러서길 바랐거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형은 또 키스하려고 달려들더라.

이래서 내가 그녀와 만나게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랑니를 뽑으라고 했던 거야. 그럼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치고 4번을 만나면, 한 달 정도는 김형이 키스하려고 달려드는 일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앞으로 제가 어느 정도의 빈도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데이트 신청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것이 괜찮은지…."



이게 지금 연락 빈도나, 데이트 신청 절차의 문제, 지속적인 연락이 문제가 된 게 아니잖아. 그녀를 향한 김형의 마음이야 순수할지 몰라도, 김형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거든. 그냥 '여자가 급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잖아. 게다가 김형은 나름 그녀에게 실망해서 연락을 끊었다고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 보면 그건 '키스하자고 들이대다가 안 하니까 연락 끊는 남자'처럼 보일 뿐이야.

탓하고 싶으면 그녀를 탓하지 말고 김형을 탓해. 이 관계를 망친 게 누구야? 김형이잖아. 그런데 왜 김형은 지인들에게 그녀를 아무렇게나 설명해 놓고 "그 여자는 정신적으로 이상한 것 같다."따위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 그게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태도야? 남들에게 내가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여자처럼 설명하는 거? 구애를 하는 입장이기만 하면 언제나 위로와 동정만을 받아야 하는 건가? 그 이유가 뭐든 오로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대를 바보 만드는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연애 할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김형은 어떻게 생각해?

"다들 그럽디다. 세상에 여자는 많다. 다른 여자 만나라.
그 여자 제정신이 아니다. 이상하다. 만약 잘 돼서 결혼해도 문제다.
하지만 이렇게 어영부영 후지부지 끝내긴 싫습니다.
제게 그녀는 매력 있는 여자고, 또 제가 좋아하고 있는 여자니까요."



그게 김형이 좋아하는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야? 남들에게 내가 힘들다며 그녀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해서 저주를 이끌어내고, 그렇지만 사랑한다고 하는 거? 연락 빈도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기 전에, 김형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 정말 비겁한 행동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2014년 2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 아직도 2007년이나 2011년 등의 세월을 살고 있는 대원들이 많이 보인다. 다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어 특정한 그 시기에 매달려 계신 거겠지만, 난 그 대원들에게 얼마 전 웹에서 본 문장 하나를 소개해 주고 싶다.

"제가 좋아하는 게임이 있는데, 그 게임은 한 판 하는데 5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떠오릅니다.

'5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의 차이점은?'

제작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멘트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멘트 다음에 나오는 멘트는 게임을 끄라는 얘기니까 말입니다.
저 멘트 다음에는 아래와 같은 멘트가 나옵니다.

'5분 전 당신에겐 5분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다.'

그 문장을 보면 게임을 끄고 다시 삶에 집중하게 됩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소중한 기억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그 기억에 지배당한 채 자신의 삶을 일시정지 시켜두는 것에는 반대한다.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세상의 구성원 중 하나가 분명한데, 혼자만 이방인인 채 하며 삶에 거리를 둔 채 사는 것에도 반대하고 말이다.

조금 전까지 실수만 계속 반복했다고 낙심할 것 없다. 그건 그대만 그런 게 아니다. 나 역시 매일 절망하고, 또 매일 다시 희망을 갖는다. 하도 드나든 탓에 절망과 희망의 문턱이 다 닳아 버렸을 정도다. 그러니 그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실버타운에서 댓글로 안부를 물을 그날까지 바짝 달려들어 살아보자. 힘들 땐 서로를 격려도 해가며.



▲ 가까운 누군가의 손 한 번 잡아주고, 또 등 한 번 두드려 줄 수 있는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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