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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첫 연애를 하게 될 줄 알았던 그녀, 왜 실패했을까?

by 무한 2012. 9. 25.
첫 연애를 하게 될 줄 알았던 그녀, 왜 실패했을까?
어제 저녁 산책을 하다가 동네에서 너구리를 봤다. 몹시 목이 마른 듯 배수로 근처까지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철망 때문에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무슨 비닐봉지가 철망 위에 올려져 있나 싶어 힐끗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서 멈춰 섰는데 녀석은 내가 놀라는 소리에 더 놀라 기겁을 하더니 곧 화단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매뉴얼과 관련된 얘기는 아니지만, 오늘부터 너구리와 친해지기 위한 프로젝트를 실시해야 하는 까닭에 얼른 매뉴얼을 발행하고 또 나가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자 적는 글이다. 며칠 전 족제비도 본 적이 있는데, 족제비는 배가 고픈지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닭고기와 옥수수를 준비해 녀석들과 친해져 볼 생각이다. 혹시 며칠간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너구리에게 물려 공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길 바란다.(경기도 파주는 질병관리본부에서 지정한 공수병 위험지역이다.)

자 그럼, 너구리 얘기는 이쯤 하고, 출발해 보자.


1. 그의 행동은 관심이라기보다는 처세술


모임에서 남자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인사를 한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관심'이라고 받아들이는 대원들이 있는데, 미안하게도 그건 그냥 '처세술'의 일부인 경우가 더 많다. 쉽게 진지해지는 성격을 가진 대원들의 경우, 상대의 행동을 자신에게 대입해 보며 '마음이 없는 거라면 저렇게 하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이성과의 대화에 부담을 갖지 않는 타입이라면 마음이 없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어울릴 때 나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남자 - 원래 집이 일산이세요?
여자 - 아뇨. 서울에 살다가 이사 왔어요.
남자 - 서울 어디요?
여자 - 홍제요.
남자 - 어! 나도 홍제 살았었는데. 홍제 어디요? 고가 근처?
여자 - 맥도널드 쪽이요.
남자 - 나도 거기 자주 갔는데! 어쩌면 우리 마주쳤을 수도 있겠어요!



대략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눈 후라면, 앞으로 그 모임에서 난 저 여자사람을 볼 때마다 '홍제'라고 외칠 것이다. 여자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같거나 어리다면,

"홍제 안녕~"


이런 식으로 말이다. '홍제'는 그녀를 부르는 애칭이다. 편하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하고 공감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내세우면 어색하지 않게 친해질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내겐 '세브란스 신생아실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지인이나 '서울 출생'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지인, '독립문 바다약국'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지인들이 있다. 전혀 어렵지 않다. 모임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상대와 나의 별자리가 같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천칭자리!"


식으로 구호를 만들어 친해지는 거다. '활발한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담당할 줄 아는 사람의 경우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친해지는 것을 이미 익혀두었을 것이다. 사연을 보낸 대원이 만난 남자 역시 이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과 나이가 같은 사람을 발견하곤, 공감대의 구호를 외치며 친해지려 한 것이다.

"동갑~ 안녕!"


저건 카톡으로 개그 애드립을 치며 함께 놀 수 있을 정도의 사이라는 의미다. 이성으로 생각한다거나, 사귀어 보려고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연을 보낸 대원은 저렇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그와 전 사는 곳이 좀 먼데, 전 첫 연애를 장거리연애로 하게 되는 걸까요?
장거리연애라는 어려움은 사랑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겠죠?"



라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 그가 모임에서만 저런 구호를 사용할 뿐이지, 먼저 연락을 한다거나 만나자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상대는 같이 놀자고 다가오는 건데, 이쪽에서는 연애를 하려고 드니 자연히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다. 상대보다 한 발 앞서나갔던 여성대원의 슬픈 이야기, 아래에서 더 살펴보자.


2. 추파, 추파-추파-추파! 우렁찬 추파 소리


추파를 던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건 가랑비 작전이 아니다. 가랑비 작전은 시나브로 상대의 마음이 내게 젖게 만드는 것이데, 사연을 보낸 대원은 대놓고 물을 끼얹고 있지 않은가.

"에버랜드 가고 싶은데 애들이 다 바쁘대. 혼자 갈 수도 없고."
"날씨가 추워졌어. 슬슬 옆구리도 시리고."
"신혼여행은 몰디브로 간다더라고. 이런,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이번 주말에 뭐해?"
"파전? 나 파전 진짜 잘하는데. 해물파전. 해줄게 올래?"
"오면 내가 놀아주지."
"카톡사진 말고 다른 사진은 없어? 사진 좀 보내줘~"
"나도 남자친구가 생기긴 하려나?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바다 보러 가고 싶다."



첨부된 카톡대화 37장 중, 앞의 12장에서만 뽑아낸 그녀의 멘트들이다. 카톡대화를 읽으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아니, 이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달달하게 대화를 받아 쳐주는 상대의 리액션에 끌려 그때그때 '여지'를 던져 본 것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심심한 외톨이 여자사람'이 되고 만다. 솔로부대원들에게 늘 강조하던 

"당신의 외로움을 들키지 말라."


라는 말을 잊었는가. 저런 이미지를 만든 까닭에, 보통 지나가는 말로 여기기 쉬운

"불러주는 사람도 있고 좋겠네."


라는 말도, 그녀가 하면 진심으로 들리고 만다.

이미 물을 엎질렀으니 그건 어쩔 수 없고, 그것보다 저렇게 추파를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놀러 오면 먹을 것도 해주고, 놀아 주겠다는데도 놀러오지 않는다는 건 마음이 없다는 얘기다. 보통 이쯤 되면 대부분의 여성대원들은 금방 마음을 접기 마련인데, 남들보다 복근이 좀 단단한 사연의 주인공은 찾아갔다. 어디로? 심남이네 동네로.


3. 저기요,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설명하면 재미없으니까, <그 남자, 그 여자> 버전으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그 여자>
무턱대고 그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 연락하자 좀 당황한 듯 했지만
친절히 마중까지 나와 자기 차에 날 태웠다.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는 밥을 사주겠다며 날 이끌었다.
식당에 도착해선 그가 내 신발을 챙겨주고 수저도 챙겨줬다.
카톡대화에서 느꼈던 장난스러움은 별로 없고, 남자다움이 있었다.
차로 돌아왔을 땐 벨트를 하라며 또 날 챙겼다. 여자로 대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헤어질 때는 그가 다음엔 날 잡아서 일찍 놀러 오라는 말을 했다.
매너 있는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었는지, 터미널 편의점에서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과자와 음료를 사서 나에게 줬다.
아 행복해. 곧 나의 첫 연애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엔 '그 남자'의 얘기를 보자.

<그 남자>
유정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우리 동네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이 많아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더니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퇴근 후 급하게 차를 몰아 터미널로 갔다. 초췌한 몰골의 유정이가 보였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힘이 없어 보이기에 얼른 밥을 먹여야 할 것 같아서 식당엘 갔다.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야 하는데 그냥 들어가기에, 내가 유정이 신발까지 넣어줬다.
테이블에 앉았다. 카톡으로는 부담스럽지 않게 대화했는데 만나보니 좀 부담이 되었다.
어색함을 깨고자 수저를 챙겨주고, 물수건으로 손 닦으라는 말도 해줬다.
밥을 먹고 차에 탔는데 유정이가 안전벨트를 안 했다.
요즘 집중단속기간이라 걸리면 벌금이다. 그래서 유정이에게 벨트를 매라고 했다.
밥만 먹고 얼른 집에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에, 다음에는 일찍 놀러오라고 말했다.
아까 식당에서 밥을 남겨서 그런지 유정이는 아직 배가 고픈 것처럼 보였다.
편의점에 가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줬다.
배가 고픈 게 확실했는지, 그보다 더 좋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정신없는 하루였다.



이성이 아니라 동성친구가 나를 보기 위해 우리 동네에 놀러 왔다고 해도, 난 그를 맛집에 데려가 밥을 먹일 것이고, 주변에 흥미를 느낄만한 곳들을 데려가 구경도 시켜줄 것이다. 그가 나를 보기 위해 놀러 온 '손님'이기 때문이다. 설마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먹인 뒤에 알아서 집에 가라고 하거나, 바빠서 못 만날 것 같다며 알아서 집에 가라고 하겠는가. 예의상 한 이런 행동에서 '여자로 대하는 것'이나 '날 챙긴다'는 것을 느끼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아직 둘의 얘기가 끝난 건 아니지만, 한가위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둘의 이야기도 끝날 거라고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신 대원은 이미

"왜 답장이 없어~ 나랑 놀아줘~"


라며 매달리기 시작했고, 상대는 답장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딱 지금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좀 급한 까닭에 추석 연휴에 그를 또 만나려고 한다. 게다가 그와 곧 연애를 하게 될 거란 기대감에 들떠 자신의 외로움을 그에게 덤핑처리 하고 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친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일상을, 그것도 부정적인 부분들을 시시콜콜 보고함으로 인해 상대의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와 내가 친구라면 "야, 오늘은 카톡 그만 보내고 나랑 너구리나 관찰하러 가자."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친구가 아닌 까닭에 그녀는 오늘도 그에게 카톡으로 '보고'를 할 것 같다. 한 번에 '전부'가 되려고 하지 말고 '일부'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는 건 어떨까. 내가 오늘 너구리와 만난다고 바로 너구리를 쓰다듬을 수는 없다. 얼굴을 익힐 시간이 필요하고 가까이 가도 경계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너구리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행동과 시간을 통해 증명해야 하고 말이다. '추석이 끝나면 당장 연애시작' 보다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것' 정도로 템포를 늦추길 권한다.



회사 일 힘들다고 심남이에게 징징거리는 건, 쥐약입니다. 남자의 대화법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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