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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븐, 사랑과 우정과 범인과 사건의 종합선물세트

by 무한 2012. 7. 18.
더 레이븐 - 사랑과 우정과 범인과 사건의 종합선물세트
어린 시절, 부모님 친구 분들이나 친척 어른들은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종종 '종합선물세트'를 선물로 받곤 했다. 하지만 종합선물세트의 화려한 포장과 큰 크기에 마음이 들떴던 것과 달리, 포장을 벗기면 허술해 보이는 박스가 나타나고, 그 박스를 열면 더욱 허술해 보이는 과자들이 나타나 실망을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3할이면, 나머지 7할은 슈퍼에 가서 절대 구입하지 않을만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더 레이븐>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이 딱 그랬다. 구색은 갖춰져 있고, 이것저것 많이 들어간 것도 같은데, 그냥 그게 전부다.


1. 브루스 윌리스의 <13일의 금요일>


내가 생각하는 포우의 장점은, 전후사정이 궁금해지는 기괴함에 대해 잘 다룬다는 것이다. 장면이 확확 바뀌는 스릴러 영화로는 포우의 분위기를 살리기 어렵다. 느린 호흡으로 슬금슬금 분위기를 조성한 후 관객이 '대체 이 불편한 분위기는 뭐야? 원인은 뭐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라며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더 레이븐>은 포우의 작품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벌어졌을 법한 이야기를 다뤘기에, 포우 특유의 장점을 모두 놓쳐 버렸다.

이런 전개라면, 굳이 포우일 필요는 없었다는 거. 심각한 문제다. <브루스 윌리스가 제이슨 역을 맡아 열연한 13일의 금요일>따위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이슨은 가면 쓰고 나와서 캠핑 온 젊은이들을 하나씩 해치울 텐데, 그 가면 뒤에 부르스 윌리스가 있든 톰 행크스가 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브루스 윌리스를 '13일의 금요일'에 활용하려면, 제이슨이 해치우려는 집단에 브루스 윌리스의 딸이 속해 있다든지, 아니면 제이슨을 따라한 모방범죄가 많이 일어나 퇴역한 경찰인 브루스 윌리스가 그 사건을 해결하러 나서든지 해야 한다. '지금 가면 쓰고 나오는 사람이 브루스 윌리스'라는 걸 강조하려, 영화에 필요 이상으로 제이슨을 노출시키는 것 대신에 말이다.

포우를 내세워 홍보하는 영화에서, 정작 포우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차라리 포우가 죽기 전 24시간 정도, 또는 12시간 정도를 다뤄 그 심도 깊은 분위기를 끌어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니면 포우와 엮는 걸 과감히 포기하고, 포우 소설의 모방범죄만을 현대로 가져와, 보다 빠른 진행과 치밀한 범죄로 관객들이 함께 주인공을 걱정하며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든지 말이다. 180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사, 추리물은, 미드 <CSI>도 지겨워 하게 된 현대의 관객들을 따분하게 만들기 쉽다.


2. 저 장면, 어디서 봤더라?


콜라와 사이다, 주스와 와인이 맛있다고 해서 몽땅 섞으면 맛이 산으로 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너무 밋밋한 사랑얘기 같다고 추격신을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이상해질 것이고, <세븐>이 너무 딱딱하고 잔인한 수사물 같다고 러브신을 집어넣으면 쓸 데 없이 얘기만 길어질 것이며, <쏘우>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고 희생자들의 우정을 엿 볼 수 있는 장면을 집어넣으면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 레이븐>의 제임스 맥티그 감독은 그 일을 실제로 저지르고 말았다. 이전 영화들에서 인상 깊게 본 장면들이 <더 레이븐>에서 비슷하게 재연된다. 그것도 뭔가 2%씩 부족한 상태로.

<더 레이븐>에서 다루는 범죄는 <세븐>과 닮아 있고, 주인공의 로맨스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닮아 있으며, 잔인함은 <쏘우>와 닮아 있다. 두 남자 주인공의 모티브는 <셜록홈즈>에서 따온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홈즈는 없고 왓슨만 둘인 느낌이다. 둘은 사건을 해결하긴커녕, 범죄자가 남긴 단서를 모으기 바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은 뒷북만 치고 다닌다.

어차피 실화에다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섞는 거라면, 아예 좀 더 심하게 뻥을 쳤으면 어땠을까 싶다. 포우가 글을 써서 발표할 때마다 그 이야기 속의 범죄가 실제로 일어나고, 사람들은 포우의 글에 관심이 없는 까닭에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거다. 포우와 범죄자는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둘 만 아는 그 이야기를 어느 날 형사도 알게 되고, 영화에선 범죄자가 벌이는 '마지막 사건'에 세 사람이 끼어들어 벌이는 이야기만을 다루는 것이다. 관 속에 갇혀서 관객들로 하여금 '근데 저 여잔 밥을 어떻게 먹지? 저렇게 갇혀서 볼일이 급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만 들게 만드는 여자 주인공 얘기는 아예 빼 버리고 말이다.


3. 같이 좀 즐기고 싶어요.
 

수사물, 혹은 추리물이라면 관객에게 함께 즐길 수 있는 떡밥을 꾸준히 나눠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관객이 그게 쉰 떡밥인 줄 모르고 덥석 물었다가 '아, 이게 아니었군.'하는 후회를 하거나, 여러 심증들을 종합해 가며 범인을 지목하려 영화에 빠질 테니 말이다. 그런데 <더 레이븐>은 떡밥을 나눠주지 않는 까닭에, 범인이 드러난 뒤에도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범인은 왜 저런 짓을 한 거지?'
'그냥 '모방범죄를 하고 싶어서'라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처음엔 분명 범인 몸집이 크다는 떡밥을 던졌었는데... 이게 뭐지?'



"자, 이 사람이 범인입니다. 이제 다들 아셨죠? 그럼 다들 집에 조심히 돌아가세요."라는 이야기에 등 떠밀려 극장에서 나온 느낌이랄까.

"근데, 범인이 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라고 물으면, 감독은

"열등감 때문이겠죠. 그래서 포우의 소설에 나온 범죄를 따라한 거고…
뭐…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포우의 마지막 5일을 영화에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고,
그냥 포우의 마지막은 이랬을 것이다, 라고 상상하며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주세요."



라고 답할 것 같다. <아마데우스>에서의(살리에르의) 열등감이나 <미져리>에서의(애니의) 집착이라면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을 텐데, <더 레이븐>에서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관객이 납득할 수 있으려면 범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배경을 좀 깔아 주거나, 영화 속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그 모습이 드러났어야 한다. 벽에 걸린 총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한 줄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그 총을 주인공이 써도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법칙처럼 말이다. 그런 설명 없이 훗날 필요에 의해 사건이 뚜렷한 개연성 없이 일어나는 건, 반칙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 너무 큰 기대를 하고 봤기에 더욱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영화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한 듯한 명대사 하나는 건졌다.

"신은 그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주셨어요. 대신 불행한 운명도 함께 주셨죠."


전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책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다.

Q. 작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해야 하는 일은 뭐죠?
A. 그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는 것이지.



영화를 보고 나서 침착한 심연의 관찰자, 포우의 책을 다시 한 번 들춰보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 <1408>의 존 쿠삭을, 불타는 집 앞에 그냥 세워만 두다니! 이건 명백한 배우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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