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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피쉬보다 더 열정적인 닥터토끼 이야기

by 무한 2010. 1. 22.

▲ 닥터토끼 덕분에 즐거웠던 가을 어느 날, 사무실 책상 위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회사 사무실에는 토끼를 키웠다. 웹디자이너 K누나가 출근 길에 화원 밖에 내 놓은 토끼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주인이 나오더니 막무가내로 토끼를 떠 안겼다고 한다. "많이 이용해 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토끼를 주면 토끼장 등 관련 용품을 살 거라는 고도의 전략인지 모르겠지만, 회사에 도착하는 즉시 토끼장과 톱밥, 먹이통이 마련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가구회사였다.) 밖에는 호기심 왕성한 강아지와 새끼고양이들이 있었으므로 위험에 노출시킬 수가 없어 토끼를 사무실에서 키우기로 했다.

사무실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토끼를 보고 한 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어머어머, 이거 진짜 토끼예요? 너무 귀엽다. 근데 토끼가 새끼나면 자기 새끼를 다 잡아 먹는 다고 그러죠? 아, 그건 햄스터였나?"

'아줌마는 지식인.'

(부천 사장님과의 대화)



"우리 회사에선 개 키워요. 시베리아 말라뮤트. 두 살인데 너무 귀여워요."

'시베리아 허숙희겠지.'

(인터넷 쇼핑몰 MD와의 대화)



"우리 어릴 적엔 눈 내리면 산에 가서 토끼를 잡았어. 얘들이 뛸 때마다 눈밭에 빠지면서 잘 도망을 못 가거든. 도망가도 발자국이 남으니까 금방 찾을 수가 있지.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 모를걸?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까 뭐 아나? 자연에서 배워야지. 일도 그래.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직접 해 보고, 그래야 제대로 하는 거지. 나 컴퓨터 못해도 30년 동안 이거 해 왔어. 컴퓨터 뭐 좀 할 줄 안다고 다가 아니란 말야. 그리고..."

'스물 두 번째 듣습니다. 언제나 같은 결론, 존경스러워요.'

(인천 사장님과의 대화)



이 외에도 자신의 집에는 '금계'가 있다며 굳이 집까지 데리고 가서 확인시켜준 고객도 있었다.

'나…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튼 식사시간에도 회사 사람들은 늘 토끼 이야기를 했다. 토끼의 간이 엄지손톱 만한데 그게 몸에 그렇게 좋기 때문에 용왕님도 탐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소 간 얘기로 넘어갔다가 '마장동에  친구있다 VS 횡성에 친구있다'의 배틀이 붙었고, 결국 몸에 좋은 건 해구신이라는 이상한 결론을 내기도 했다.

불길한 복선이 깔린 것은 '겨울이 되면 줄 먹이가 없다.'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부터였다. 가을로 접어드는 당시엔 민들레나 시레기 등 먹이로 줄 것들이 많지만 겨울이 오게 되면 초록색 식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데, 개나 고양이처럼 잔반을 줘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키우기 곤란해 질 거라고 디자인실의 A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때 되면 꽤 커질 테니까 괜찮아." 라고 답했다.

'커지니까 괜찮다는 말은, 서…설마!'

그 이야기들로 약간 불편한 기분이 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키우는 개들이 애완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저 귀여운 토끼마저…. 나중에 먹이를 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 집에라도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심장을 얼음물에 담그는 바로 이 느낌 (출처-
이미지검색)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앜

뭔가 내 발가락에 닿았다. 분명 촉촉한 느낌. 전기 선 따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엌에 쥐가 극성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설마 그 쥐가? 내 발을?

기겁하며 일어서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앜ㅋㅋㅋㅋㅋㅋ 이게 더 아펔ㅋㅋㅋㅋㅋㅋ'

내 무릎과 책상이 합작으로 낸 쿵 소리에, 뭔가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도 났다. <톰과 제리>의 제리인가. 다리를 절룩이며 파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조심히 책상 밑을 들여다 보았다.

'토끼잖아!'

녀석은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언제 싸 놓았는지 사과 씨만한 배설물과 비타민C를 먹었을 때나 볼 수 있는 노란 오줌도 있었다. 식사시간에 녀석은 탈출을 감행했고, 해 낸 것이다.


▲ 탈출에 성공하곤 이런 느낌이었을까. (출처-이미지검색)


'자유다!' 라는 느낌이었을까. 난 녀석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조금 뒤로 밀어 녀석의 움직임까지 지켜볼 수 있는 앵글을 만들었다. 눈치를 살피던 녀석은 다시 내 발쪽으로 다가왔고, 난 직감적으로 녀석이 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내 발을 원하고 있어.'

난 뭔가에 홀린 듯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조심히 녀석에게 내밀었을 때, 녀석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녀석은 내 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엄지발가락부터 뒤꿈치까지 정성껏 각질제거를 했고, 간지러움을 겨우 버티며 한 발의 작업(응?)이 끝나자, 다른 발도 달라는 듯 몸을 돌렸다.

'이건… 닥터피쉬, 아니, 닥터토끼구나…'

이 신기한 광경을 본 회사 사람들은 저마다 발을 내밀었으나, 닥터토끼는 지조있는 여인처럼 남의 발 가까이엔 가지 않았다. 억지로 토끼에게 갔다 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닥터토끼는 달아났다. 웹을 통해 알아 보 결과, 먹이가 부족하거나 염분이 부족하거나 애정표현을 하고 싶을 때 핥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먹이는 충분히 주었으니 염분이 부족하거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일텐데, 다른 사람의 발이 아닌 내 발만 찾으니 애정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내가 발에 땀이 나긴 하는데…, 염분 때문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

그 사건 이후로 난 '토끼아빠'라는 별명이 생겼고, 점심시간마다 식사를 일찍 마치고 밖에 나가 풀을 뜯어다 주었다. 주변에 풀이 별로 없을 때에는 밭에 있는 배추를 몰래 뜯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토끼를 사랑했는지 토끼는 알지 못할 거다.

토끼가 없어진 것은 우리가 함께 한 지 38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 기간동안 난 백여 잔의 커피를 마셨고, 서른 갑의 담배를 피웠으며, 네 번 정도 손톱을 잘랐고, 한 번 미용실엘 갔다. 회사에서 키우는 동물들이 차례로 사라지던 셋째 주 일요일, 토끼는 사라졌다. 내 책상 아래 검은콩만한 배설물만 가득 남긴 채.

닥터토끼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어디에 있든 건강하게 잘 살라고 비는 것과 녀석이 남긴 흔적들을 치우는 것 밖에 없었다.


▲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출처-
이미지검색)

슬퍼하는 나를 위해 친구는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토끼는 별이 된거야. 저 수 많은 별들이 먼저 간 토끼들의 영혼이지…"

친구가 술을 끊었으면 좋겠다.


<세 줄 요약>

전생에 닥터피쉬였던 토끼
부탁해도 되니 너에게 기억이 부르는 날에 널 사랑하던 그 얘기를 다시 한 번 들려줄 수 있게
친구가 술을 끊었으면 좋겠다.




▲ 손가락 버튼과 별 버튼을 누르며 잠시 닥터토끼의 안녕을 빌어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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