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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독실한 종교인인 저는, 이 이별을 통해 뭘 배워야 할까요?

by 무한 2016. 11. 1.

종교와 관련된 연애사연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문의하는 게 좋다. 종교에는 상담의 역할도 포함되어 있으니, 교리를 공부하며 스스로 답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고 말이다. 그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하던 연애를 내게 가지고 오면, 난

 

“이게 뭔 소리죠?"

 

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는 아무래도 좀 많이 동떨어진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그러면 또 그들에겐 내 이런 반응이 이단의 모습으로 보이거나, 구원받지 못한 자의 세속적인 이야기들로 비치거나,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본 저급한 이야기들로 보일 수 있다. 난 S씨가 이런 시각 차이까지를 충분히 수용할 생각으로 보낸 사연이라 여기며, S씨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종교는 정당화와 합리화의 수단?

 

내가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이며 연애 중이라고 해보자. 사귈 땐 내 마음대로 사귀었지만, 사귀고 보니 상대와 나의 안 맞는 부분도 많이 보이고, 나도 살기 바빠 죽겠는데 자꾸 사랑을 갈구하는 상대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좀 피하다 보니, 상대는 폭발하며 날 선 이야기들까지를 내게 던진다. 난 그 모습을 상대의 한계로 여기며, 이런 모습까지를 보여주는 건 상대와 헤어지라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님의 계시라고 생각해버린다.

 

저 얘기가 웃기려고 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종교와 관련된 사연들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연애를 하는 건 사실 ‘나’와 ‘상대’라는 두 사람인데, 종교인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신이나 신과 대적되는 존재가 주는 거라 여기는 일이 많으며, 나아가 자기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그 결과만을 두고 그걸 신의 뜻이라 여기는 사례도 있다.

 

그렇게 인과관계에 신을 대입하면 본인 마음은 편할 수 있지만, 그걸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어 상대가 화를 내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지금 너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는 악한 영들이 불어 넣은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이후 더 감정이 격해져 헤어지자는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에서

 

‘결국 이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걸, 아후라 마즈다님께서는 이렇게 내게 보여주시는 거구나. 이제 연애보다는 영적능력 향상에 더욱 힘써야겠다.’

 

하는 생각을 할 뿐이라면, 우주의 기운에는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만큼 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더불어 이별을 통보하고 난 뒤 상대에게

 

“그대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그대를 더욱 강하게 할 것이니, 아즈다님은 마음이 힘든 자들 가운데 함께 하시느니라. 아즈다님의 보살피심으로 그대 더욱 강해지리니.”

 

따위의 이야기까지 한다면 시쳇말로 ‘노답’이 될 수 있는 거고 말이다.

 

신을 믿기만 하면 내 잘못과 비겁함과 무책임함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오로지 남의 잘못과 비겁함과 무책임함만이 문제가 될 뿐인 건가?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에 남이 지적을 하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며 내게는 그저 시험일뿐인 건가? 연애는 상대와 내가 한 건데 왜 이별할 땐 신의 손을 붙잡고 나 혼자 맘 편히 나가는가? 내가 상대를 방치하다 유기해 놓곤, 상대의 행복을 기도해주면 그걸로 다 해결이 되는 건가? 종교라는 게 어떻게 ‘나’를 위한 종교만 되고 ‘우리’를 위한 종교는 될 수 없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현실적으론, 고지식한 배려남에 더 가깝지 않을까?

 

‘난 뭐든 괜찮으니 네가 하자는 대로 거의 다 하겠다’는 건 배려가 아니다. 그건 그냥 얼마쯤 맹목적으로 상대에게 맞춰주겠다는 것이고, 선택에 대한 책임도 결국 상대가 다 지도록 하겠다는 것이며, 관계에서 한 발 물러나 상대를 내버려두겠다는 것에 가깝다.

 

게다가 저런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를 짐처럼 여기게 된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한 친구가 우리 집에 몇 달 머물고자 찾아왔는데, 그 친구에게 TV와 컴퓨터와 냉장고 등을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당장이야 큰 문제가 없겠지만, 갈수록 ‘내 생활’이 없어지며 상대를 위주로 살아야 하는 것에 심한 피곤이 느껴질 것이다.

 

“뭘 하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괜찮다.”

 

라며 베풀려던 친절과 배려가, 결국은 불편함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친절과 배려를 일곱 남자에게서 경험한 노멀로그 독자 M양(32세, 부산거주)은 아래와 같은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하이고오. 됐다 마. 치아뿌라.”

 

S씨의 여자친구는 S씨가 그 관계에 ‘참여’하길 바랐던 건데, S씨는 자신의 고지식한 배려만을 베풀다, 결국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해준 건데, 뭘 더 어쩌라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훗날 S씨가 다른 연애를 할 때에도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게 될 테니, ‘오빠’나 ‘보호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어린애 정도로 여긴 채 맹목적인 허용만 베푸는 태도는 꼭 수정하길 권한다.

 

 

3. Why so serious?

 

S씨가 한 말을 보자.

 

“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아무리 그 사람 손을 잡아주고 싶어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면 절대 함부로 그 손을 잡지 마라. 같이 빠져죽는다.’ 결국 전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타깝지만 입술을 꽉 문 채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는 모습 같아서 멋져 보일 순 있는데, 진짜 이게 정말 무슨 손을 잡으면 빠져 죽고 어쩌고 하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고 중대한 일인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외부 요인으로 인해 엄청난 갈등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이 연애를 포기하지 않으면 둘 중 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이걸 크게 해석하고 엄청난 문제로 받아들이는 건지 솔직히 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건 S씨가 여친에게 소홀한 태도를 보이고 그것에 대해 여친이 항의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여기에 왜 ‘감당할 수 있는 고통’, ‘같이 빠져죽는다’같은 이야기가 나오는가?

 

잘못의 9할 이상은 S씨가 한 거다. 다른 어떤 여자에게든,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든

 

“앞으로 난 이러이러한 걸 해야 해서 너에게 신경을 못 써줄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해보자. 그 얘기를 듣고도 헤헤 거리며 다 이해하고 기다릴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머리에 총 맞은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듣든 저 말은 서운하며 ‘이 사람에게 난 뭐지?’라는 생각까지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만한 말인데, S씨는 저 말을 여자친구에게 하고선 그녀가 불만을 표시하자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관계’라고 여기지 않았는가.

 

여친이 S씨에게

 

“정말 수치스럽고 비참하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건, 여친이 이상하고 파탄 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폭주한 게 아니라, S씨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거다. S씨는 여친을 ‘이제 관심이 사라져 귀찮아진 애완동물’처럼 대했는데, 누구라도 그런 대우를 받게 되면 울부짖게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S양 여친도 S씨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녀의 고민이든 생각이든 주장이든 그건 모두 S씨의 그것들과 동등한 무게를 갖는 건데, S씨는 그걸 얕잡아 본 것 같다. 여친이 하는 고민은 애들스러운 고민이며 내가 하는 고민은 어른스러운 고민, 여친의 불평은 징징거림이지만 내 불평은 이별까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여긴 것 같다.

 

 

정리하자면, S씨는 맹목적으로 상대에게 다 맞춰주고 받아주려는 연애를 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생활까지 다 없어진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녀를 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조율을 하고자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지만, 양해를 구하는 방식이

 

“이제 너에게 신경 많이 못 써준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기에, 그녀는 더욱 S씨에게 실망하며 극단적인 이야기들까지를 하게 되었다.

 

이걸 종교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해석하면 다양한 의미를 품은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현실에 두 다리 다 딛고 본 두 사람의 연애와 이별은, 이런 모습이었다고 적어두도록 하겠다.

 

하나 더. 연애 중 갈등이 생겨 언성이 높아졌을 때, 그냥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봐.”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건 상대를 더욱 화나게 만들며 대화 자체를 포기하는 일일 뿐이다. 자폭하며 손 떼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짓이고 말이다. 그래놓고는 또 나보다 밝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라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건 끝까지 혼자 착한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니, 다음부터는 누군가와 헤어지더라도 말 빙빙 돌려가며 자폭하지 말고, 당장 따귀를 맞더라도 S씨의 속마음을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그런 ‘최후통첩’을 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을 것이고 말이다.

 

연인을 늘 그렇게 ‘타인’으로 두면, 연인은 결국 외롭고 비참해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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