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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과여행/야생동물관찰기

동네에 출몰하는 너구리 먹이주기

by 무한 2012. 10. 6.
동네에 출몰하는 너구리 먹이주기
동네에 너구리가 출몰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추석에 만난 친척들에게 요즘 너구리와 친해지려 노력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동네에 너구리가 있어?"


라며 놀라듯 물었다. 하지만 눈빛은 분명 '이건 또 뭔 소리야? 전에는 가잰가 새우를 키운다더니만, 애가 좀 이상해 진 것 같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너구리를 관찰한다는 건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다는 식으로 말을 접었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친척들은

"그렇지? 너구리라니, 난 또 뭔 소린가 했어."


라며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역시, 진지하게 설명했으면 문제가 될 뻔 했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1. 배고픈 너구리


야생동물에겐 사실,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에게 먹이를 받아 먹다보면 녀석들의 경계심이 풀어져 아무에게나 다가갔다가 다칠 수 있고, 인위적으로 공급하는 먹이에만 의존해 사냥 본능을 잃을 수도 있다. 확인한 적은 없으나, 너구리의 경우 사람과 가까이 해 사람 냄새가 배게 되면, 무리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구리에게 먹이를 주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동네 사람들이 야생에 널린 너구리의 먹이를 죄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너구리를 만나고 있는 곳은 파주의 한 동산 겸 공원인데, 동네 사람들이 아침부터 그곳에 가서 나무 열매나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모두 줍거나 캐간다. 산책하다 떨어진 밤 몇 개 줍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쓸어간다. 공원에서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큰 마트가 있고, 공원에서 줍거나 캐가는 것은 그 마트에서 다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자연산이 최고지."


라며 도토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주워간다. 그러다보니 너구리는 공원 옆 아파트 놀이터까지 내려와 뭐 먹을 게 없나 서성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식너구리 - 아빠, 오늘도 먹을 게 없어요?
아빠너구리 - 음, 일단 이 버섯이라도 먹으면서 좀 버텨봐라.
자식너구리 - 또 버섯이에요?
아빠너구리 - 저 아파트에 음식물 쓰레기 자동처리기가 설치되었더구나. 
                봉지를 뜯어 먹을 걸 가져오는 것도 이젠 어려울 것 같다. 
                무슨 기계에 봉지를 넣어버리는데, 사람만 열 수 있더구나.

  
                  
위와 같은 대화라도 나눈 건지, 최근엔 너구리가 사람들이 먹다가 버리고 간 걸 주워 먹으러 산책로까지 내려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곧 겨울잠을 자려면 영양보충을 해 두어야 할 텐데, 먹을 것이 없으니 목숨을 건 '먹이 찾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진 그냥 좀 거창하게 풀어 본 얘기고, 솔직히 말하자면 너구리와 친해지고 싶어서 먹이를 주기로 했다. 같은 동네 살고 밤마다 마주치니 친해지면 좋은 것 아닌가. 너구리에게 물려 공수병에 걸리면 발병 후 평균 25일 내에 100% 죽는다고 하던데, 이것도 보험적용 되나? 설계사한테 문의해 두어야겠다.


2. 메뉴는 소시지


처음에는 너구리가 강아지사료도 잘 먹는다기에 간디(애완견, 애프리푸들) 사료를 좀 가져다주려고 했다. 그런데 공쥬님(여자친구)이

"간디 사료는 비싼 건데, 모질개선이랑 연골강화성분이 들어있는…."


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포기했다. 여담이지만 간디 샴푸가 내 샴푸보다 더 비싸다. 간디는 입이 심심할 틈 없이 육포도 먹고, 개껌도 먹고, 여러 가지 간식도 먹는데 난….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여하튼 그래서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햄이나 사다가 너구리 먹이로 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이 장을 보러 갔던 어머니께서

"얘가 미쳤어. 무슨 너구리한테 마늘햄 씩이나 줘? 세일도 안 하는 걸."


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조용히 마늘햄을 내려놓았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내 생각대로 강하게 밀어붙였겠지만, 개인적으로 2012년 슬로건을 "여자 말을 잘 듣자."로 정한 까닭에 양보했다. 그러고는 햄 옆에 착한 가격표를 단 채 일렬로 누워있는 소시지를 집어 들었다.



▲ 가격이 착한 소시지, 너로 정했다.
 

꼬꼬마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가장 싸가고 싶었던 소시지다. 저 소시지는 햄과 달리 부서지는 듯한 식감과 특유의 비린내가 매력적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저 소시지가 몸에 좋지 않다며 한 번도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지 않으셨는데, 난 학교에 가서 내 비엔나 소시지와 친구의 저 소시지(계란 입혀서 구운 것)를 바꿔 먹곤 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용돈을 들고 슈퍼에 드나들 나이가 되어서는 저 소시지가 과자와 비슷한 가격인 것을 발견하곤 놀라운 가성비에 감격하며 사먹은 적도 있다.(반 정도 먹으니 토할 것 같아서 좀 아쉽기는 했다.)



▲ 너구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준비했다.


너구리가 소시지를 먹을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과자나 먹다 남은 추석음식 등을 가져다 줬는데 다 잘 먹었기 때문이다. 산책로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시간, 준비한 소시지를 가지고 너구리를 만나러 출발했다.


3. 먹이그릇으로 의사소통


산책로는 활동을 막 시작한 야생동물들로 분주했다. 올빼미로 추측되는 새가 아파트 옥상과 공원을 오갔고, 족제비는 쥐를 잡는지 산책로 옆 언덕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구리를 만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풀들을 헤치면 자고 있던 풀벌레와 나방들이 짜증을 내며 날아 자리를 옮겼다. 잡초가 무성한 언덕에서 부스럭 소리와 함께 풀들이 움직이는 걸 보니, 너구리가 먹이를 찾으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 미리 알아 둔 너구리의 통행로에 먹이그릇을 놓아두었다.


먹이그릇을 놓은 뒤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 하는데,

푸다다다다다다다닥-

내 뒤에서 너구리가 뛰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풀들을 헤치며 들어온 곳이 너구리가 산책로로 나가는 통행로였는데, 멀리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던 너구리가 나를 발견하곤 놀라서 공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뛰어온 것이다. 그 2.47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내 심장은 얼어붙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은커녕,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너구리는 나와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 옆으로 뛰어 공원으로 들어갔다. 너구리가 공원으로 사라진 후에도 놀라서 곤두섰던 내 털들은 계속 서 있었다.

아직 내 얼굴이나 목소리도 익숙하지 않고, 내 냄새를 아는 것도 아니니 녀석은 나를 침입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녀석의 영역을 존중하기 위해 산책로로 얼른 물러섰다는 건 훼이크고, 녀석이 다시 달려 나와 내 다리를 물까봐 도망치듯 산책로로 나왔다.

나만큼이나 녀석도 놀랐는지, 내가 '우쭈쭈쭈' 하며 열심히 혀를 차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안전거리확보'를 하느라 꽤 멀리서 혀를 찬 거니 들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녀석이 나오지 않아 난 산책이나 하고 오기로 했다. 그렇게 산책로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왔을 때,



▲ 너구리가 소시지를 다 먹고 엎어 놓은 먹이그릇.


녀석의 입김으로 뿌옇게 된 먹이그릇이 엎어져 있었다. 눈치가 좀 빠른 독자라면 먹이를 담았을 때의 사진과 위의 사진에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먹이그릇을 놓고 찍은 처음 사진은 가까이서 찍었지만, 빈 먹이그릇은 좀 멀리서 찍었다. 사진으론 잘 안 보이지만, 먹이그릇 뒤쪽은 잡초 숲이다. 그곳에서 언제 너구리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때문에 먹이그릇 회수도 못하고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원래 계획은 먹이그릇을 놓아두고, 너구리가 나타나 먹이를 먹으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이었는데 한 번 놀라고 나니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먹이그릇에 먹이를 주다가 친해지면 손으로도 먹이를 주려 했던 계획은 망설임 없이 폐기했다. <그리즐리 맨>이라는 영화를 보며 언제든 '야생동물과의 교감'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걸 배웠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도 촬영이 가능한 동영상으로 녀석을 담기로 했다. 적외선 카메라가 있으면 보다 쉽겠지만, 요즘 내 지갑에 IMF가 온 까닭에 적외선 카메라를 지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집에 있는 장비들로 동영상 촬영 준비를 한 채 새로운 먹이를 들고 다음 날 저녁 다시 그곳을 찾았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설치하고 근처 나무에 조명을 매달아 먹이그릇을 비춘 뒤 난 자리를 떴는데…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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