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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사귀자니 부족해 보이고, 마음을 접자니 아쉬운

by 무한 2012. 6. 7.
사귀자니 부족해 보이고, 마음을 접자니 아쉬운
E씨가 금요일에 결판을 내겠다는 메일만 안 보냈어도, 사실 난 좀 더 E씨의 사연을 받고 싶었다. E씨의 사연을 읽을 때면, '철저하게 상황과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는 사람의 연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연애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뭐, 여하튼.

자신의 감정을 본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점에 있어 E씨는 문학소년과 비슷하다. 하지만 공학소년으로 청년기를 보낸 E씨는 문학소년과 달리 계산이 빠르다. 문학소년처럼 대책 없이 자신을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거나,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보다 안전한 선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사연을 통해 E씨가 한 얘기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만약 그게 '연애'가 아닌 '계약'이라면 아쉽더라도 손을 떼는 게 맞다. 정 때문에 손해를 보는 거래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저쪽은 이미 E씨에게 넘어 온 것이 확실해 보이며, E씨는 상대에게 2%의 부족함을 느끼는 상황. 그런데 상대는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 하며 E씨에게 다가온다. 물론, 그건 일종의 어리광이거나 능청이지만, 손익계산을 하고 있는 E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괘씸한 일이다. 애원해도 사귀어 줄까 말까인 상황인데, 장난하듯 가벼운 태도를 보이다니. 

E씨는 금요일에 상대를 만나 위와 같은 이야기를 다 꺼내 놓으려 한다. "이러이러한 부분에 대해 잘라 말하려 합니다."라고 E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한 여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주겠다는 공학소년을, 친절한 무한씨가 어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자, 달려보자.


1. 애정이 없을 때 발생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E씨의 말은 분명 틀린 것 하나 없지만, 감성적으로 보면 그보다 더 과격한 말도 없다. 어려운 일을 당한 죽마고우가 돈을 빌리러 E씨에게 왔다고 해보자. 그 친구는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기에 먼저 안부를 묻고,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들을 하며, 최근 곤란해진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거기에 대고 E씨는 말한다.

"그냥 돈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빌려줄 수 있냐고 묻지, 뭔 서론이 그렇게 기냐.
추억을 담보로 돈을 빌리려고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는 거냐?
아님, 곤란해진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동정심이라도 유발하려는 거냐?
돈 빌리러 온 게 뻔한데 무슨 안부를 묻고 있냐.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해라.
얼마가 필요한 거냐? 대체 뭐 하고 살았기에 그 돈도 없냐."



폭력이다. 가끔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전 뒤끝이 없지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뒤끝이 없으면 뭐하나. 앞에서 대놓고 난도질을 하는데.

아무도 빈말 따위는 하지 않으며, 철저히 논리적으로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그런 세상에선 일단 옷을 사서 입고 다니는 것부터가 힘들 것이다. 점원은 미소를 거두고 그대가 뭘 입어도 모양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줄 테니까. 친구를 만나 그런 점원의 흉을 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 친구는 점원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며 그대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 놓을 테니까. 가족도 안전하진 않다. 어머니께서는 모임에 나갔다가 들은 '친구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 그대의 한심함과 비교하실 테니까.
 
함께 밥을 먹을 때, 상대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는 것. 그게 애정이다. E씨는 "각자 원하는 메뉴를 시킨 거고, 만약 상대가 제 반찬을 먹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줄 것인데, 굳이 반찬을 올려 줄 필요가 있나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E씨의 말이 틀리다는 게 아니다. 다만, 마주 앉아 각자의 밥을 먹는 것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하고 싶다. E씨가 세상사람 모두가 손가락질할 만한 일을 저질렀을 때, 여자친구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네가 잘못한 게 맞아."라며 사람들과 함께 손가락질을 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지금 누구보다 앞장 서 상대에게 손가락질 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2. 패션카페의 지인 이야기.


지인이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옷을 사러 간다기에 같이 간 적이 있다. 패션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람이 외국에서 들여온 옷이라고 했다. 옷을 파는 회원은 냉혹한 패션평과 박학다식한 구입기 등으로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를 만난 느낌에 대해선 자세히 적지 않겠다. '고수'라고 추앙받는 그 분의 패션감각을 나 따위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파란 색만 하더라도 백 가지가 넘는 색상으로 나눌 수 있다."라거나 "바지 재봉선의 굵기만으로도 사람의 이미지가 달라진다."고 말하는 그 분의 말은 내게 난해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읽었던 "수력발전으로 만든 전기로 듣는 음악과, 화력발전으로 만든 전기로 듣는 음악은 그 질이 다르다. 락 음악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로 듣는 게 제 맛이다."라는 유머가 떠올랐다는 것만 적어두겠다.

여하튼 그 분은 지인에게 "헐리우드 스타일을 모방해 가며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 체형이 브래드 피트와 비슷하니 그를 롤모델로 삼아서 옷을 구입해라."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지인은 브래드 피트의 코디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주변 사람들이 지인의 옷차림에 대해 "과감해 졌네."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지인의 스카프나 멜빵, 빵모자 등을 보며 안타까워했다는 점만 적어 두겠다.

같이 거리를 걷기 힘들 정도로 지인의 패션이 과감해 졌을 때쯤, 지인은 코디를 해주겠다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인은 누군가를 만나면 "지금 그 옷에는 메탈이 아니라 가죽줄 시계가 더 어울린다."라든가 "바지통을 좀 더 줄이면 훨씬 세련되게 보일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남들에 대해 분석하려 할 경우, 지인과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눈만 높아지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E씨의 사연에서도 그와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사연만 보자면 E씨는 거의 완벽한 남자다. 스스로 고백한 몇 가지 단점이 있긴 하지만, E씨는 그 단점들에 대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 말한다. 유머감각은 없지만 자신은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말이다. 거기까진 '자존감'의 차원이라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단점에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상대의 단점에 대해서는 냉혹하다는 점이다. E씨는 상대에게서 발견한 단점들을 가지고 상대의 유년기를 추측한다. E씨가 예상한 것과 다른 모습을 상대가 보일 경우 그 원인은 어떤 트라우마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한 가설을 세우기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터는데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를 두고 분석하고 예상하다 보면 실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질 수 있다.

당시의 한국은 시골단위에서 최소행정단위로 리(理)라는 단어를 썼다한다. 놀랍게도 파리, 알제리, 양촌리등 세계 여러 지역에 이런 리 단위를 쓰는 도시들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적 도시라 불리던 파리도 한국의 일개 시골농촌단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파리가 시골이 되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을 짐작 할 수 있다.

- <1000년 후 세계 학자들이 본 한국> 중에서 (출처-오유 : 원출처불명)
 

상상에만 의존한 채 상대를 파악하려 해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3. 손해 볼 일 없는 연애를 하는 법


손해 볼 일 없고, 아플 일 없는 연애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E씨는 현재 매우 잘 하고 있는 거다. 그런 연애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진심을 숨길 줄 알아야 하고, 반대로 상대는 감춘 것 없이 모두 털어 놓도록 분위기를 잘 '연출' 해야 한다.

또, 연애를 시작하게 되더라도 '시승' 하는 기분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아직 내 마음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에서 괜찮은 상대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한단 얘기다. 그렇게 상대를 만나다 보면 예상했던 단점이 두드러지게 보이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며 실망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 "아무래도 우린 아닌 것 같다." 정도의 이야기로 손 툭툭 털고 빠져 나오면 된다. 이게 손해 볼 일 없고, 아플 일 없는 연애를 하는 방법이다.

상대는 E씨에게 '현재의 마음'까지 모두 털어 놓았는데, E씨는 하나 둘 가려가며 상대가 들어도 문제없는 속마음들만 털어 놓았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부분들에 대해서만 솔직했다.(물론, "너랑 사귀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얘기를 안 한 건 잘 한 거다. 그런 소리를 했다면 따귀를 맞았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두 사람이 연애를 해 E씨가 손해를 입을 경우, 상대는 그만큼의 이익을 얻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연을 통해 짐작컨대, 둘이 연애를 할 경우 큰 손해를 입는 것은 상대일 것이다. E씨는 자신이 재미없는 얘기 한 것은 가볍게 말하면서, 상대가 웃지 않은 것은 큰 죄인 것처럼 얘기하지 않는가. 게다가 E씨는 '상대가 날 좋아한다 말하지만, 혹시 혼자 있는 것이 싫어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그러는 건 아닐까.'라며 음모론까지 펴고 있다.

E씨에게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추천해 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비스티 보이즈>는 소설가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에 대한 오마주라고 생각하는데, 내 감상평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영화 후반부 승우와 지원이 싸울 때 지원이

"단무지 같은 자식아, 넌 공사 사이즈도 안 나와."


라는 이야기를 왜 하게 되었는지, 승우는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길 권한다. 난 그 장면에 '손해 볼 일 없는 연애'를 하려고 했던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일주일 전 씨를 뿌린 허브 화분에, 어제 싹이 돋았다. 허브농원에서 파는 허브들처럼 자라려면 앞으로도 몇 달은 더 걸릴 것이다. 실용성으로 치자면 다 자란 허브를 사 오는 게 낫다. 내가 씨를 뿌린 허브는 발아율이 떨어지는 까닭에 얼마나 싹이 날 지 알 수 없으며, 관리해야 하는 수고를 따지면 경제적으로도 화분을 사 오는 게 이익이다.

하지만 '내가 씨앗부터 발아시켜 키운 화분'과 '농장에서 사온 화분'은 분명 다른 것 아닌가. 발아를 하지 않아 마음 졸이던 순간, 머리를 내민 싹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며 흐뭇해 하던 순간, 물이 부족하진 않을지 일조량이 부족하진 않을지 염려하며 수시로 관심을 쏟던 순간, 이런 순간들이 내 2012년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손익계산은 치워 버리고, 애정을 갖고 상대와 만날 때 난 E씨가 '연애'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음에 뿌려진 씨앗, 부지런히 가꿔 크게 키우길 바란다.



"이 세상에 약한 것이 여자 여자 여자." 설운도의 10집 앨범도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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