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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천오백자연애상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의대생 남친, 우린 끝난 걸까요?

by 무한 2017. 3. 8.

반말로 친근하게 써달라고 했으니,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난, 또 이렇게 말 놓고 매뉴얼 작성을 시작할게. 그렇다고 나 너무 쉬운 남자로 보는 거 아니지? 그러리라 믿어. 나 사실 되게 어려운 남자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닿지 않게 ‘코카콜라’ 발음할 때만큼이나 어려워.

 

 

 

선희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의 상황이나 사정’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야. 뭐, 상대와 몇 번 보고 앞으로 안 볼 거면 그래도 되겠지. 그런데 연인이라면, 상대에게 중요한 일은 내게도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며, 내가 따뜻하고 배불러도 상대는 혹시 춥거나 배고프지 않을지 확인해볼 수 있어야 하는 거거든.

 

이전의 연애부터 한 번 봐봐. 구남친 가족 중 한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데, 선희는 남친이랑 연락 잘 안 되고 마음껏 만날 수 없다는 것에 짜증 부렸잖아. 이것에 대해선 선희도 훗날 후회와 반성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보기엔 이번 연애에서도 여전히 그런 모습들이 드러났어. 의대생인 남친이 내일 정말 중요한 시험이 있으니 그 시험만 끝나고 얘기하면 안 되냐고 했을 때 선희는

 

‘휴전 따위는 없다. 시험 때문에 휴전하자고 하는 것에 난 더 빡친다.’

 

라는 식으로 공격을 퍼부었잖아. 흔치 않은 일이라 신상이 특정될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남친의 학업(일)이나 가족과 관련된 일로 평소만큼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 선희는 십중팔구 폭발했고 말이야.

 

 

그게 어쩌면, 선희는 무슨 일을 하든 ‘연애’에만 집중한 채 다른 일들을 다 번외 편처럼 생각해서 더 그럴 수 있어. 선희가 연애를 하는 방식을 보면, 연인에게 거의 모든 걸 다 말하고, 누구와 만나든 마음은 연인에게 가 있다는 걸 알리려 애쓰거든. 그런데 그게, 연애를 ‘즐기기’엔 그것만큼 마음 꽉 차는 일이 없겠지만, ‘지속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어.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서로 마주본 채로 여행을 하자는 것과 같거든. 에펠탑이 저기 있어도 나만 봐, 루브르에 들어와서도 나만 봐, 면세점에서 뭐 안 사도 되니까 나만 봐,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남친에 대한 정서적 의존이, 선희는 보통의 경우보다 심한 편이야. 그런 까닭에 카톡을 실시간 일기장처럼 되어버리고, 남친에게 말하고 싶은 그 날 12가지의 주제 중 하나만 남친이 안 받아줘도 삐치게 돼. 연애 중이던 어느 날 하루 선희가 남친에게 말한 주제를 봐봐.

 

- 나 친구 만나러 가. 몸도 안 좋아서 가고 싶지는 않지만, 미리 약속해뒀던 거니까 가는 거야. 오빠는 가족들이랑 뭐해. 가족들이랑 있을 때 사진도 좀 찍어서 보내줘. 친구 만나서 밥 먹고 있어. 이거 완전 맛있어. 나중에 같이 먹자. 오빤 뭐해. 근데 나 옷 산 거 사이즈가 너무 커. 교환 환불 안 돼서 그냥 줄여 입어야 하는데 이거 줄일 가치가 있을까. 친구랑 노래방 갈 거야. 노래하고 싶은데 나 목 상태가 안 좋아서 노래 못해. 오빤 뭐해. 가족들이랑 있는 거지? 난 집에 들어왔어. 요즘은 나와 친구들과의 관계가 이러쿵저러쿵 한 것 같아. 나 잠 안와서 셀카 찍었어.

 

못할 말을 한 건 아닌데, 거의 모든 대화가 저런 식이라면, 남자인 내 입장에서 봤을 때 받아주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 반대로 내가 선희처럼 내 연인에게 계속 저런 식의 보고를 하며 실시간 리액션을 해주길 바라는 거라면, 그러지 못하는 순간순간 연인에게 서운해 하거나 섭섭해 할 것 같고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봐봐. 선희가 ‘집착이 심한 백수’라는 조건의 남친과 만나는 중이야. 남친은 선희에게 실시간으로 일상보고를 해. 선희가 일하고 있는 시간에도 계속 그는 연결되어 있으려고 하고, 그러다 선희가 못 받아주면 “넌 내 마음 같지 않은가보네. 나도 연락줄일게.” 또는 “나 아픈데 연락도 없네. 잘게.”라는 메시지를 보내. 선희는 점점 벅찬데, 남친은 계속 맞춰가야 한대. 남친이 악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또 잘 울어. 왜 더 자기를 챙겨주지 않냐며 속상하다고 우는 거야. 선희는 집안에 고소사건이 발생해서 가족들과 저녁에 대화하며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남친은 실시간으로 절망했다 분노했다 짜증냈다 애원하는 메시지를 보내놔. 그럼 결국 선희도 점점 지쳐서는 ‘생각할 시간을 갖자’며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겠어?

 

선희가 ‘집착이 심한 백수’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저런 느낌일 수 있다는 얘기야. 얼른 선희를 만나고자 전력질주 하는 남친 좋지. 좋은데, 사람이 늘 전력질주하며 살 순 없잖아. 연애하며 하는 대화의 8할이 “왜 전력질주 할 수 있는 걸 설렁설렁 뛰냐. 날 사랑하면 전력질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면, 상대 입장에서는 벅찰 수밖에 없어. 상대로서는 이쪽이 자신과 사귀는 것에 대한 기쁨이라는 것 없이 늘 불만족에 시달리며 더더더더를 외치고 울기만 하는 것 같으니까, 자연히 이별을 생각하게 되는 거고 말이야.

 

이 매뉴얼이, 모든 잘못이 선희에게 있다는 의미는 아니야. 남친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라서, 시험 망친 뒤 선희에게 대놓고 “네가 내 학교생활의 걸림돌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잖아. 이런 부분만 모아서 적어 놓으면 또 모든 게 남친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내가 말까지 놓은 채 내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작성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선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며, 알면 고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연인의 연락 하나하나에 너무 기쁘고, 대화하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건 좋은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연락이 없는 순간순간에 절망하고, 대화하지 못 할 때 남친을 찌를 가시만 세우게 되는 건 불행을 부르는 가장 빠른 방법일 거야. 삶의 축을 ‘연애’라는 하나에만 둔 채 거기에 모든 걸 올려두진 마. 그럼 연애가 그걸 지탱하기에도 벅찰뿐더러, 선희는 그게 혹 무너져 전부 엉망이 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게 되며, 앞으로 얼마든 더 기대도 좋다는 확인을 받는 일에 몰두하게 될 거야. 밥벌이라는 축, 친구나 지인이라는 축, 가족이라는 축, 선희라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축 등 가능한 한 여러 축을 세워두길 권할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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